안경(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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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나게 추운 날
2009. 12.15 화요일 계단 청소를 마치고 교실을 나섰는데, 이미 아이들은 집에 가고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복도 창틈마다 차가운 바람이 위이잉 하고 새어나올 뿐! 바람은 복도를 물길 삼아 돌다가, 가스가 새듯이 흘러들어 복도 안을 불안하게 워~ 돌아다녔고, 나는 이 바람이 몸을 스르륵 통과하는 유령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을 때, 내 몸은 눈사태 같은 추위에 파묻혀버렸다. 나는 추위에 쪼그라든 몸을 최대한 빨리 일으켜 얼음처럼 딱딱한 신발을 후닥닥 갈아신었다.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내려갈 때 내 몸은, 바람에 밀리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바람을 가르는 운석처럼 타타타타~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정문은 괴물처럼 입을 쩍 벌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바람을 쿠후우..
2009.12.16 -
속임수
2009.05.03 일요일 여기는 연천 구석기 축제 행사장이다.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원시인들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놓은 곳인데, 어린이날을 맞아 엄청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가 열린 넓은 잔디와 꽃밭에는 벌떼처럼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요리조리 다니며 구경하다가, 구석기 시대 움막이 세워진 풀밭에서 연극을 한 편 대충 보고 난 후, 간단한 퀴즈 대회를 연다고 해서 구경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들었다. 북이 울리고 원시인 분장을 한 사회자 아저씨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 연극에 나왔던 두 부족의 이름은 무엇과 무엇입니까?", "오스트랄로족의 남자가 피테쿠스족의 여자에게 청혼할 때 선물한 것은?", "이 아저씨의 몸무게는?" 하는 문제들을 내었다. 나는 답을 맞히지 못하다가 ..
2009.05.06 -
전교 회장 선거
2009.03.13 금요일 선생님은 얼마 전에 교실에 새로 들어온 TV를 자랑스럽게 켜셨다. 그리고 전교 회장 선거가 열리는 우리 학교 강당이 나오는 화면에 채널을 맞추시고, 회장, 부회장 후보의 연설을 들으라고 하셨다. 5, 6학년 중 자원한 열 몇 명 되는 후보들의 연설을, 하나하나 방송으로 들으며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설을 들으며 무엇보다 화면에 비추는 후보들의 눈빛을 자세히 관찰했다. 나는 눈빛을 통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어떻게 눈빛을 통해 아느냐고? 그 기준은 간단하다. 자신을 사랑하고, 삶에 대한 의지와 목표가 있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은 눈에서 푸른 빛이 나온다. 아니, 눈빛에서 푸른 희망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눈빛은, 나이가 아주 많은 할아버..
2009.03.14 -
싸움
2008.11.14 금요일 4교시 체육 시간, 자유 활동 시간이라 아이들은 운동장 여기저기 흩어져서, 산만하게 축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운동장 입구에서 해영이가 목을 높여 노래 부르듯 소리쳤다. "해송이는 수아를 좋아한대요오~!" 해영이 앞에 몇 발짝 떨어져 걷던 해송이가 뒤를 돌아보며 "야, 이 새끼야! 거기서!" 하며 달려들었다. 해영이는 "나 잡아봐라!" 하며 교실 쪽으로 달아났다. 해송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해일처럼 해영이를 쫓아갔다. 나도 놀라 해송이를 뒤쫓아갔는데, 해송이가 하도 빨리 뛰어 반만 달리다 멈추었다. 잠시 뒤 해송이가 씩씩거리며 나타나서 해영이를 놓쳤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 뒤쪽으로 돌아 다시 나타난 해영이가 작은 돌멩이를 몇 개 주워가지고 와, 마구 던지기 시작하는 것..
2008.11.15 -
폭포 분수대
2008.08.15 목요일 나는 호수공원, 노래하는 분수대 광장에서 트라이더를 한바탕 신나게 탄 다음, 땀을 식히러 분수대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땅에서 위로 총총 솟아오르며 아이들과 노는 분수대가 나더러 오라는 듯 손짓하였다. 그러나 나는 분수대를 외면하고 그 위에 있는 폭포 분수대 쪽으로 더 올라갔다. 왜냐하면, 지난 여름 분수대에서 놀다가 잠깐 분수가 꺼졌을 때, 호기심에 분수가 나오는 구멍에 엎드려서 얼굴을 바짝 대고, 언제 다시 물이 나오나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푸아~!' 하고 솟아오르는 물줄기에, 거세게 얼굴을 맞고 놀라서 뒤쪽으로 몸이 휘청하며 밀려나가더니, 코로 물이 들어가고, 코로 들어간 물이 입으로 다시 켁켁 나왔다. 안경에도 물이 차서 앞이 안 보여 비틀거리는 순간 다..
2008.08.25 -
2006.06.24 스위스 전
2006.06.24 토요일 나는 밤에 자다가 물이 마시고 싶어서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그런데 아빠가 "상우야, 후반전 시작한다!" 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후닥닥 안경을 챙겨 쓰고 텔레비젼 앞에 앉았다. 우리 나라 축구팀이 0대 1로 지고 있었다. 스위스 팀과 우리 나라 팀은 모두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다. 나는 져도 괜찮으니까 우리 나라 팀이 열심히 싸워서 한국의 기상을 높여 주길 바랬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심판이 오프 사이드를 선언해 놓고 스위스 팀의 골을 인정해 버린 것이다. 한국 선수들은 화난 얼굴로 심판에게 막 따졌다. 그래서 어떤 선수는 옐로우 카드를 받기도 했다. 나는 그 사실이 분하고 서러웠다. 우리 팀이 2대 0으로 졌지만 인정할 수 없다. 나도 이렇게 서러운데 선수들 마음은..
2006.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