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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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를 신고 처음 본 연극
2011.05.28 토요일 오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보았다. 6월에 있을 교육과학기술부 블로그 기자 해단식을 앞두고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오늘 그동안 활동했던 기자들이 대학로에 모여 연극도 보고 식사도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나는 약속 장소로 오는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 요즘 나는 사는 것이 고달프게 느껴진다. 아직도 나는 모든 게 미숙한데 주위에서는 내게 완벽한 행동과 현실성을 요구한다. 마치 나는 채식주의 상어인데, 엄청 용감하고 물고기 잡는 데 앞장서는 사냥꾼 상어이기를 강요받는 현실에 나는 자꾸만 자신감을 잃는다. 나는 도서관에 있다가 허둥지둥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신발이 없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약속 시각에 늦을까 봐 급하게 구한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거리를 걸어야 했다...
2011.05.31 -
엄마보다 커버린 나
2010.06.08 화요일 학교 갔다 와서 샤워한 뒤, 옷을 입고 드라이를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엄마가 키를 재보자고 내 옆에 서보셨다. 화장대 거울에, 나와 내 옆에선 엄마의 모습이 나란히 비추어졌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나와 엄마의 키가 비슷비슷했었다. 때로는 엄마가 키높이 신발을 신으셔서 잘 느끼지 못했는데, 거울로 보니 어느새 내 키가 엄마보다 훌쩍 더 커 있었다. 5학년 때만 해도 엄마보다 작았던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상상하지 못하였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네 살인가, 다섯 살인가? 할인마트에서 엄마를 잃어버려, 미아보호소에서 방송을 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 엄마가 달려오셨다. 그때 고개 숙여 나를 안아주던 엄마는 정말로 커 보였다. 그래서 언제나 엄마..
2010.06.09 -
친구 집에서 옷 말리기
2010.02.22 월요일 "아, 이게 뭐야? 다 젖었잖아!", "아,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이런!" 석희와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307동 문앞, 계단에 앉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집에서 가져온 축구공으로 놀다가, 그만 서로서로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친 것이다. 장난을 친 뒤 우리는 온통 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장난치는 걸 바라보던 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골치 아프다는 듯이 눈을 감고 "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 동안 꽁꽁 얼었던 눈이 슬슬 녹아서, 단지 전체가 조금이라도 움푹 팬 곳에는 물로 가득 채워지고, 맨땅에도 물구덩이가 여러 곳이 생겼다. 그 속에서 우리는 철벅 철벅 공을 발로 차고 놀았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내 바지는 물에 젖어 무거워졌고, 양말도 축축해지고 신발 안에까..
2010.02.25 -
끝장나게 추운 날
2009. 12.15 화요일 계단 청소를 마치고 교실을 나섰는데, 이미 아이들은 집에 가고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복도 창틈마다 차가운 바람이 위이잉 하고 새어나올 뿐! 바람은 복도를 물길 삼아 돌다가, 가스가 새듯이 흘러들어 복도 안을 불안하게 워~ 돌아다녔고, 나는 이 바람이 몸을 스르륵 통과하는 유령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을 때, 내 몸은 눈사태 같은 추위에 파묻혀버렸다. 나는 추위에 쪼그라든 몸을 최대한 빨리 일으켜 얼음처럼 딱딱한 신발을 후닥닥 갈아신었다.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내려갈 때 내 몸은, 바람에 밀리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바람을 가르는 운석처럼 타타타타~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정문은 괴물처럼 입을 쩍 벌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바람을 쿠후우..
2009.12.16 -
처음 넘은 철봉
2009.04.03 금요일 체육 시간에 우리는 보통 단계별로 운동을 시작한다. 1단계가 제일 낮은 철봉을 잡고 한 바퀴 도는 거다. 그다음엔 2단계 더 높은 철봉, 3단계 철봉, 그다음엔 높이 뛰기, 이런 순으로. 난 언제나 1단계를 통과하지 못한 채, 나처럼 통과 못한 몇명의 아이들과 벌칙으로 개구리 뜀질을 하면서 시작해야 했다. 오늘도 1단계 철봉 앞에서 나가질 못하고 쭈물거리는 5명 정도의 아이들과 나를 향해, 우리 반 계주 선수이자 체육부장인 성환이가 보다못해 달려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철봉 밑에 저벅 엎드리더니, "너희들 나 밟고 올라가!" 하는 것이었다. 마침 바로 내 차례였는데, 성환이가 운동은 잘하지만, 몸집은 나보다 가늘어서, 과연 나를 떠받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성환이에게..
2009.04.04 -
신발 장수 아저씨
2007.11.07 수요일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나오니까 오후 5시쯤, 오늘의 마지막 해가 학원에서 공원에 이르는 길까지 찬란하게 빛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아폴론과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를 보는 듯한 느낌에 빠져 일광욕을 즐기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공원 입구 방범 초소 맞은 편 풀밭에서 매일 보던 신발 장수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그 아저씨는 주로 운동화를 팔았는데, 이름이 있는 좋은 브랜드 신발은 파란색 플라스틱 탁자 위에 진열해 놓았고, 이름 없는 신발들은 땅바닥에 진열해 놓았다. 그 아저씨가 그 자리에서 신발을 팔게 된 지는 한 달도 넘었는데, 손님들이 신발을 사거나 기웃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장사가 안돼서 그러는지. 항상 일자로 다문 입에 싸늘한 표정의 신발 장수 아저씨는 주로 ..
2007.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