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과 두루미

2013. 9. 21. 00:40일기

<보름달과 두루미>

2013.09.18 수요일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으니까 몸이 뻐근했는데 보름달이 무지 밝았다. 나는 밤 10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엄마와 영우와 함께 산책을 다녀 오겠습니다!"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바깥은 어둡고 캄캄했지만, 조용하게 걷기에는 시원하고 포근한 공기였다.


여기는 대구 달성군 화원읍 아파트 단지, 친할아버지께서 살고 계신 곳이다. 아파트 단지 후문 밖을 벗어나자 개천이 가운데 흐르는 산책로 겸, 놀이터가 바로 보인다.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가 놀이터로 접어드니, 사박사박한 모래길에 걸음이 홀린 듯 척척 걸어진다


개울가를 따라 잔잔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앞장 서 힘 있게 걸었다. 보폭을 넓혔다가 줄였다가, 한쪽 발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뜀박질을 뛰었다가 주저앉았다 하며, 평범한 동작으로 걷는 게 싫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동작으로 모래길을 내달렸다. 엄마와 영우가 키득키득 하는 소리를 뒤로 한 채, 팔다리를 뼈 없는 연체 동물처럼 걷다가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뒤따라 오는 엄마와 영우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대구 하늘에 둥근달이 떴구나.


달은 휘영청~ 떠서 어둔 밤하늘을 달빛으로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달이 휘영청 떴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모호하게 느꼈었는데, 직접 보니 알 것 같다. 이건 그냥 딱 보기에 휘영청~ 떠 있는 거다. 다른 말은 생각하기 힘들다. 한참 목 빠지게 휘영청~ 뜬 달을 지켜보다가 머리가 무거워 땅으로 목을 늘어뜨리니, 갈색 모래 땅 위에 무언가 초록색 물체가 납작 엎드려 있었다. 처음에는 이걸 너무 오랜만에 봐서 뭐라고 하는 지 까먹었다. 한 2초 정도 후에 개구리라는 이름이 떠올랐지만! 중학교 1학년 과학 실험 때, 개구리의 배를 갈라 내부를 관찰했던 일이 기억나는데, 그때 녀석은 몸집이 아주 컸던 데에 비해 이녀석은 몸이 작고 날렵해 보였다.


나는 뒤를 보고 "영우야! 여기 개구리가 있다!" 하자, 엄마와 영우가 잽싸게 다가오며 "어머, 정말 아파트 단지 안에 개구리가 있네?" 했다. 영우는 신이 나서 "어, 개구리, 나랑 놀자!" 하며 풀숲을 밟는 순간, 어두운 초록색의 개구리는 굽힌 몸을 이용해 추진력을 얻어, 폴짝 뛰어서 어둡고 촉촉한 풀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개구리 한마리가 우리가 있는 곳을 신비스럽게 바꿔놓았고, 우리는 걷는 김에 개울 끝까지 걸어가 보았다. 갑자기 흐르던 개울이 끝나고 개울의 경사가 90도로 쭉 떨어져, 폭포처럼 물이 콸콸 흘러 더 큰 개천으로 뻗어나갔다. 개울이 끝나는 지점에서 길이 끊겨 다시 돌아오려 했는데, 순간 나는 무엇을 보았다. 더 큰 개울로 흘러가는 90도의 둑 위 한가운데서 새 모양의 동상이 세워진 것을.


길고 가는 다리를 쭉 뻗고, 긴 머리와 뾰족한 부리는 땅으로 축~ 늘어뜨리고, 달빛을 받아 하얀색으로 빛나는 날개를 가진 큰 새의 조각이 있었다. 그림같지만, 한편 실제같은 새 동상 모습을 보여주려고 엄마랑 영우를 급하게 불렀다. "와아, 저게 뭐지?" 그때, 갑자기 새 동상이 접었던 날개를, 클리넥스 사각 휴지곽에서 휴지 뽑아내는 것처럼 슈라락~ 부드럽게 뽑아 몇 번 날갯짓을 하더니, 고개를 똑바로 들고 땅을 지탱하던 다리와 함께 온몸이 공중에 붕 뜬 채로 퍼덕퍼덕하며 어두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우리는 모두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새가 차마 진짜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저건 두, 두루미야!" 영우가 외쳤다.


개구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두루미를 대구에서 볼 줄 몰랐다. 여기가 이렇게 시골인가? 난 두루미가 날갯짓 하는 것을 봤을 때의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두루미의 날갯짓을 계속 생각하며 걷다가 발끝에 무언가 부딪혔는데 그게 크게 들썩거렸다. 이것도 역시 개구리였는데, 아까 봤던 초록색 개구리와는 달리 엄청 커서 내 손바닥만하고 황색에 검은색 점박이도 몸 여기저기에 있었다. 엄마와 영우가 또 허겁지겁 달려온다. 개구리는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풀숲으로 기어들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영우랑 나는 그네에 올라 앉아 옛날 생각을 했다. 우리가 어렸을 땐 서로 그네를 밀어주며 놀았는데, 지금은 둘 다 이마에 여드름이 나고 신경이 날카롭고 만나기만 하면 사자와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는구나. 영우랑 나는 약속한 것처럼 앞으로 뻗어나갈 때는 다리를 곧게 뻗었고, 그네가 뒤로 쭉 빠질 때는 다리를 쭉 접어서 그네 밑으로 넣었다. 눈앞에는 계속 그 두루미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