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으로 빨래 널기

2013. 8. 17. 05:52일기

<알몸으로 빨래 널기>

2013.08.16 금요일


여름이 막바지, 한낮의 기온이 33도가 넘는 더위 속에 나는 오늘도 윗옷을 입지 않은 채, 아래는 사각 팬티 차림으로 감질 나는 미니 선풍기 바람을 쐬며 집 안에 콕 틀어박혀 있다. 아무도 나를 보는 사람은 없다. 그때 엄마가 아래층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엄마는 보기만 해도 덥고 무거워 보이는 청바지 빨래 덩어리를 한꾸러미 안고, 잔뜩 인상을 쓰면서 말씀하셨다. "가서 널어!" 내가 군말 않고 아래로 내려가 엄마의 빨래를 받자마자 엄마는 쓰러지는 시늉을 하셨다. "잘 마르게 널어야 해~"


나는 물에 불어 축축하고 무거워진 빨래 덩어리들을 품에 안고, 2층 내방을 지나 어기적 어기적 다락방을 넘어 옥상으로 들어갔다. 이 옥상은 원래 다락방이었는데, 할머니께서 작은 텃밭을 가꾸려고 개조 한 공간이었다. 아침엔 할머니와 엄마가 텃밭에 물을 주고 빨래를 널기 위해 올라오시지만, 한낮에는 뙤약볕 때문에 옥상에 나갈 엄두를 못내었다.


나는 하나, 둘 하며 옥상 문턱을 넘어섰다. 바닥엔 내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바퀴벌레 시체가 누워 있어, 슬리퍼를 신을 때 휘청 넘어질 뻔 하였다. 갑자기 불타는 햇볕을 보니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낡고 녹슨 빨래 건조대가 2개 있지만, 청바지의 부피가 크고 양이 많은데 다 널 수 있을까? 의아했다. 에이, 안 들어가면 억지로라도 낑겨 넣어야지! 물에 불은 바지를 들고 있는 것도 무거웠지만, 빨랫대 옆 앉은뱅이 의자에 바지 뭉텅이를 올려 놓고, 하나하나 빼서 펴는 것도 힘들었다.


요즘 방학이라고 더워서 집 안에만 있고 숨 쉬기 운동만 했더니, 체력과 힘이 떨어질 때로 떨어졌다는 게 절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바지 하나, 하나 뭉텅이에서 꺼내 펼 때마다,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이 내 알몸을 오징어처럼 말리는 것 같고, 손에 쥐어진 바지는 내 힘을 쪽쪽 빼앗는다. 너무 힘이 들어 청바지 뭉텅이를 건조대 위에 한꺼번에 올려놓고 잠시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더위를 잊으려고 애썼다.


더위가 좀 가시고, 머리가 다시금 맑아지니 갑자기 내가 남들이 다 볼 수 있는 야외에서, 상의를 벗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우리집 빼고는 주위에 있는 집들이 다 고층으로 재건축을 해서, 우리집 옥상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다. 또 이 골목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골목이라서 언제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옥상에서 웃통을 벗고 팬티 차림으로 빨래를 너는 이상한 남학생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아래 위로 두리번 두리번거렸다.


다행이 아직 내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아마 내가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이지만, 안심이 안 된다. 그렇다고 안에 들어가서 상의를 챙겨 입고 나오는 것도 싫었다. 몸이 흐르는 땀에 젖어 꿉꿉해서 옷을 입으면 옷이 땀에 쩔 것이고, 또 막 가신 찜통 더위가 옷을 입으면 다시금 손을 뻗쳐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옷을 안 입고 빨래를 널자니 계속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일 텐데... 와, 날도 더운데 뭐 이런 걸 고민해야 되냐? 그때 엄마가 다락방 안에서 나를 보고 계셨다.


나는 '뭐 어때? 더우면 벗을 수도 있지! 무엇보다 여긴 내 집이야! 나의 영역 안이라고! 내 영역 안에서 내가 하고싶은 데로 하는 건데 무슨 상관이람!' 하고 주장하듯이 눈썹을 치켜뜨고, 두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다시 힘차게 바지 뭉텅이를 펴기 시작했다. 청바지를 팍~ 소리가 나게 털고, 아까 전보다 훨씬 힘을 주어서 잽싸게 빨래를 널었다. 마지막 빨래까지 널고 나니 건조대에 골고루 분배하여 모두 넉넉하게 널었음을 확인했다. 난 빨래를 모두 널고서는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빨려 들어가듯, 다락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턱에 내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바퀴벌레의 시체가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