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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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케라톱스와의 대화
2009.02.21 토요일 '어! 여기는 어디지?'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양주 자연사 박물관 옥상에서, 커다란 트리케라톱스 모형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벌써 봄이 왔는지, 사방에 길고 빽빽한 벚꽃 나무 투성이다.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을 따라, 엄청나게 넓은 초록색 풀밭이 펼쳐지고, 그리고 그 앞에는 햇빛을 받아 살금살금 떨리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나는 벚나무 사이에 숨어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다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앞으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는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 속을 한참 동안 헤매고 다녔다. 가도 가도 호수를 낀 풀밭이 끝나지 않아서 "음~ 여긴 경치가 이렇게 좋은데, 왜 사람이 없는 걸까?" 하며 한숨을 쉬..
2009.02.24 -
화석 소동
2009.01.03 토요일 엄마가 바쁘셔서 집에 안 계셨다. 나는 배가 고파서 영우랑 밥 타령을 하였다. 그래서 아빠는 우리를 데리고 집에서 좀 떨어진 시골길에 있는 식당으로 가셨다. 그 식당은 오늘 다른 건 안 되고 설렁탕만 된다고 했다. 영우랑 나는 설렁탕을 훌떡 먹고 식당 밖으로 나와 뛰어놀았다. 영우는 주차장 마당 한가운데서 춤을 추며 놀았고, 나는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마른 풀숲 속을 파헤치며 놀았다. "영우야, 이리와 봐!" 영우는 춤을 추다가 "왜?" 하며 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바로 전에 풀숲 돌무더기 사이에서 발견한, 네모난 바닥에 브이(v)자 모양의 무늬가 찍혀있는 거칠거칠한 회색빛 돌을 영우 눈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영우는 얼굴을 돌에서 뒤로 떼고, 양손을 모아 돌을 잡고, "..
2009.01.05 -
기브스하던 날
2008.12.19 금요일 어제 힘찬이 교실에서 줄넘기를 하다가 다친 오른쪽 발목과 발등이, 저녁내내 심하게 부어올랐다. 나는 발을 높이 올리고 얼음찜질을 하면서, 고단하게 밤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아빠, 엄마와 병원에 올 수 있었다. 엄마가 병원 문을 열고, 아빠가 나를 업은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빠가 접수를 하는 동안 대기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종합 병원 안에는 마침 다리 아픈 환자들의 모습이 유달리 눈에 잘 띄었다. 목발을 짚은 사람도 있고, 기브스를 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좀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 긴장한 상태로 다시 아빠 등에 업혀 정형외과로 향했다. 나는 아빠의 등 위에서 의사선생님을 내려다보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였다. 의사 선생..
2008.12.21 -
신데렐라 선생님
2008.09.25 목요일 내일이면 드디어 가을 운동회다. 어제 총연습을 마쳤고, 그동안 분주했던 학교는 싸늘해진 날씨와 함께 차분한 수업 분위기를 맞았다. 마지막 5교시 과학 수업 시작하기 전, 갑자기 선생님께서 동영상을 틀어주시면서 "자, 이거 영어 연극인데, 잘 듣고 영어를 익혀 보세요! 이 연극은 신데렐라예요!" 하셨다. 연극의 배경은 우리 학교 시청각실이었고, 처음 무대 커튼 앞에서 학생복을 입은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검은색 구두 한 짝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코를 막고 무언가 찾는 듯이 영어로 중얼거렸는데, 대번에 우리 학교 선생님이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선생님들께서 꾸민 영어 연극이구나! 하는데, 무대 커튼이 열리고 어떤 사람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우리 반 ..
2008.09.26 -
해파리와 함께 수영을
2008.08.09 토요일 우리 가족은 1년 만에 기지포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왔다. 아빠와 나와 영우는 해수욕을 하려고 나란히, 바다로 이어지는 갯벌을 따라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마침 썰물이 시작된 때라 바다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우리는 촉촉촉 발자국을 남기며, 바늘처럼 따갑게 내리꽂는 햇볕을 맞으면서 바닷가로 달렸다. 눈앞에 바닷물이 넘실대자 가슴 속이 펑 뚫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와 영우, 아빠는 동시에 멈칫하고 서서, 발끝 앞에 접시처럼 엎어져 있는 어떤 물체를 보았다. 보자마자 해파리란 걸 알 수 있었다. 해파리는 작은 미니 피자 크기였고, 투명한 우유빛이어서, 속에 박힌 4개의 파란 내장 기관 같은 원모양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나는 독성이 강한 붉은 해파리가 아닌 것에 일단 안심했고,..
2008.08.15 -
끔찍한 축구 시합
2008.05.16 금요일 4교시 체육 시간, 운동장에 나가 남자는 축구, 여자는 피구시합을 하였다. 남자들은 제일 축구 잘하는 아이 2명을 주장으로 뽑고, 뽑힌 주장 2명이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자기 팀에 넣고 싶은 애를 차례대로 집어넣었다. 팀이 다 채워져 가고, 나 말고 3명이 남았다. 나는 이성환이라는 애가 주장인 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성환이는 나를 자기 팀에 넣어주지 않았다. 시합 시작하기 전, 아이들은 나는 수비수 할 거야! 나는 공격 미드필더 할 거야! 하면서 역할을 정하는데, 나는 뭘 해도 못하니 딱히 할 게 없어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데 내가 몸집이 커서 공을 잘 막을 것 같다고, 아이들이 우르르 나를 골키퍼로 몰아세웠다. 난 마음속으로는 '어어, ..
2008.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