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선생님

2008. 9. 26. 08:40일기

<신데렐라 선생님>
2008.09.25 목요일

내일이면 드디어 가을 운동회다. 어제 총연습을 마쳤고, 그동안 분주했던 학교는 싸늘해진 날씨와 함께 차분한 수업 분위기를 맞았다. 마지막 5교시 과학 수업 시작하기 전, 갑자기 선생님께서 동영상을 틀어주시면서 "자, 이거 영어 연극인데, 잘 듣고 영어를 익혀 보세요! 이 연극은 신데렐라예요!" 하셨다.

연극의 배경은 우리 학교 시청각실이었고, 처음 무대 커튼 앞에서 학생복을 입은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검은색 구두 한 짝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코를 막고 무언가 찾는 듯이 영어로 중얼거렸는데, 대번에 우리 학교 선생님이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선생님들께서 꾸민 영어 연극이구나! 하는데, 무대 커튼이 열리고 어떤 사람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우리 반 선생님이셨다! 우리 선생님은 키가 큰 남자분인데, 검은색 구불구불한 가발을 쓰고 분홍색 두건을 두르고 황갈색 치마를 입은 신데렐라 분장을 하고 나오셨다. 아이들은 일제히 "까아~!" 하고 소리를 질렀고, 어떤 아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안돼! 이건 공포 영화야! 너무 끔찍해~!" 하였다.

나도 믿기지가 않아 얼얼했지만, 굵고 매끄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진짜 우리 선생님이구나 했는데, 화면을 바라보는 선생님은 쑥스러운 얼굴이셨다. 곧이어 엄마인 듯한 사람이 나와서 영어를 몇 마디 주고받고, 또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어떤 여자 두 명이 등장했다. 그러더니 엄마가 무도회에 갈 드레스를 준다고 상자에서 너덜너덜한 천을 두 장 꺼내어 누나, 아니 언니들에게 주었는데, 언니들은 좋다고 그걸 허리에 둘렀다.

언니들과 엄마가 어디론가 가버리고, 혼자 남은 신데렐라 선생님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저렇게 신데렐라 같지 않으실 수가! 그런데 갑자기 붉은 옷을 입은 요정이 나타나 팔을 좌우로 흔들며 괴상한 춤을 추었다. 선생님도 요정 뒤에 서서 같이 팔을 흔들며 흐물흐물 춤을 추었다. 그러니까 선생님 얼굴이 요정 뒤에 가려져 요정 팔이 네 개인 것처럼 보였다.

어설픈 선생님의 연기를 보느라 영어 대화는 들리지 않았고, 아이들은 보면서 계속 비명을 질렀다. 영어로 몇 마디를 하고 요정이 어떤 상자에서 천 쪼가리와 검은색 구두를 꺼내 주었다. 여기서 갑자기 선생님이 동영상을 끄셨다. 아이들은 "휴~!" 하면서도 동시에 "에이, 더 봐요~!"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난처한 듯 살살 웃으시면서 과학 수업을 진행하셨다. 난 선생님의 다른 면을 본 것 같아서 놀랐다. 카멜레온 같은 멋진 우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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