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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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내려가는 계단 - 상우 여행일기
2008.04.15 화요일 우리가 도착한 펜션은, 깊숙한 시골 바다 절벽 위에 아찔하게 서 있었다. 펜션 안에는 작고 예쁜 마당이 있고, 마당 벼랑 끝에 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검은색 녹슨 창살 문이 어서 와요! 하고 열려 있었다. 아직 6월이 아니라서, 꽃봉오리는 피지 않고 가시만 잔뜩 붙어 있는 장미 덩굴에 칭칭 둘러싸인 채! 그 문을 조심스럽게 통과하면, 처음에는 평평한 돌계단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소나무 숲을 뚫고 들어가는 울퉁불퉁하고 험한 나무 계단 길이 이어진다. 영우랑 나는 그게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궁금하여 밑으로 계속 내려가 보기로 하였다. 영우가 먼저 날쌘 청설모처럼 순식간에 계단을 샥샥 내려갔다. 계단 길은 폭이 좁고 난간도 없이 구불구불 험하게 이어졌다. 계단이 너무 높아 나는 ..
2008.04.16 -
날쌘돌이 청설모
2008.03.24 월요일 피아노 학원 가는 길에, 공원 입구에 늘어서 있는 나무 위로 무언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그게 뭔가 가까이 가서 보려고, 나무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검은 비닐봉지가 매달려 마구 흔들거리는 모습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털복숭이다! 그 털복숭이는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는데, 눈동자가 검다 못하여 푸른색으로 똘망똘망 빛났다. 순간 내 눈도 똘망똘망해지며 아기처럼 입이 샤아~ 벌어졌다. 지나가던 동네 형아가 "청설모다! 잡자~!" 하고 외쳐서, 나도 "어~ 안돼!" 하고 외치며 형아 뒤를 따랐다. 그러자 청설모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날쌔게 다른 나뭇가지로 뛰어넘어갔다. 우리가 청설모를 쫓아다니자, 지나..
2008.03.25 -
캐논이 좋아!
2008.02.25 월요일 내가 파헬벨의 캐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작년 이맘 때쯤, 피아노 학원에서 연주회를 앞두고 어떤 형아가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나는 캐논이 너무 좋아 그 형아가 연습할 때면 장난치던 것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워 듣곤 하였다. 캐논을 듣고 있으면 내 몸이 비누 거품을 타고 둥둥 가볍게 저 하늘로 멀리멀리 날아오르는 기분에 사로잡혀 행복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1년 뒤에 돌아올 연주회에는 꼭 내가 캐논을 칠 수 있기를 바랐었다. 연주회가 다시 다가왔고 선생님께 캐논을 지정곡으로 받았을 때, 난 이게 웬 하늘의 계시란 말인가 하며 흥분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직 나에겐 어려운 곡이었는지, 치기가 너무 어려웠다. 박자를 맞추기도 어렵고 음을 정확하게 누..
2008.02.26 -
둥지
2008.02.11 월요일 도롯가에 잎을 다 떨어뜨려낸 겨울 나무 줄지어 서 있네. 수없이 많은 나무 곁으로 차들이 쌩쌩 스쳐가네.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빼빼 마른 나뭇가지들이 힘겹게 떨고 있네. 이제 막 태양은 저물어 도로와 하늘은 포도색으로 물들고 수천 개의 은빛 핏줄처럼 뻗어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포도즙이 흘러내린 것처럼 스며들다가 곧 세상은 거대한 암흑으로 변한다. 나는 갑자기 길을 잘못 흘러든 것처럼 불안하다. 빨라지는 걸음 따라 노란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다. 저 높이 시커먼 나무 꼭대기에 무엇이 걸려 있네. 비닐봉지가 걸린 것일까? 작은 먹구름이 걸린 걸까? 올라가서 잡아보고 싶네. 꺾어놓은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듯 거칠고 칙칙해 보이지만 그렇게 아늑해 보일 수가 없구나! 나도..
2008.02.12 -
2007.09.24 할아버지의 다리
2007.09.24 월요일 보름달이 밝게 뜬 추석 전날 밤, 막내 고모와 나는, 술에 취해 쓰러지신 할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나는 할아버지의 다리를 두 손으로 한 웅큼 잡았다가 놓았다가 하며 꾹꾹 주물러 드렸는데 할아버지께서 "상우가 손 힘이 아주 좋구나."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힘을 주어 정성껏 주물러 드렸는데, 할아버지께서 "가운데 다리는 주물르지 말아라." 하시는 것이었다. 고모에게 "가운데 다리가 뭐예요?" 하고 물었더니 고모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가운데 다리는 여기를 말하는 거다." 하며 할아버지의 고추 부분을 가리켰다. 할아버지 다리를 계속 주무르니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다리도 엄마 다리도 내 다리도 살이 있어 통통한 편인데 할아버지는 뼈만 남아 앙상한 나뭇가지 ..
2007.09.24 -
2006.09.24 잠자리
2006.09.24 일요일 우리 가족은 호수 공원에서 제일 전망이 좋은 정자가 있는 언덕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우가 "잠자리야, 잠자리!" 하고 외쳤다. 그래서 뛰어가 봤더니 아빠가 벌써 2마리를 잡아 놓았다. 영우와 나는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잠자리 채를 잡고 덤벼 들었다. 하늘엔 수 없이 많은 잠자리 떼가 전투기 부대처럼 어지럽게 날아 다녔다. 나는 이리 펄쩍 뛰고 저리 펄쩍 뛰면서 소란스럽게 잠자리를 잡으려고 설쳤다. 그럴수록 잠자리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건 아니지 싶어 마음을 진정하고 나뭇가지에 앉은 잠자리에게로 살금 살금 다가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살짝 잠자리채를 덮었다. 아! 빨간 고추 잠자리 였다.
2006.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