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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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할머니 집
2010.02.14 일요일 "상우야? 상우야? 깨야지?"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홍알홍알 잠결에 들려왔다. 나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내 눈앞에는 엄마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딱 붙어 계셨다. 엄마는 "어! 진짜로 일어났네!" 하시고서 나한테서 떨어져 이번에는 영우 옆으로 가셨다. 그런데 일어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정말로 푹 오랜만에 개운하게 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보통 축농증이라는 병이 있어 밤잠을 설치거나, 자고 일어나도 몸이 무겁고 어지럽거나 부스스한데, 할머니 집에 와서 자니 온몸이 개운한 게 너무 기분이 좋았다. "우와! 정말 개운하다!" 절로 감탄사가 입에서 나왔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이불 위에 짠! 하고 섰다. 방에 놓여 있는 책상 앞 닫힌 창문으로, 아름다운 빛..
2010.02.16 -
아버지 발을 씻으며
2008.05.11 일요일 학교에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라는 뜻으로 부모님의 발 씻기 숙제를 내주었다. 나는 목욕탕에 있는 세숫대야 중에 제일 큰 대야를 골라 샤워기로 한번 씻어내었다. 그런 다음 다시 샤워기를 틀어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물 온도가 아빠 발에 맞을지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아빠는 적당하다고 하셨다. 아빠는 발을 내밀기가 부끄러운 듯 머뭇머뭇 하시다가, 바지를 걷고 대야에 발을 담그셨다. 나는 비누에 물을 묻혀 손바닥에 칠하고, 박박 문질러 뽀글뽀글 거품을 내었다. 그리고 크림 같은 거품이 잔뜩 묻은 손을 아빠 발에 꼼꼼히 문질렀다. 마치 내 손이 붓이 되어 페인트칠을 하는 기분으로 부드럽게 아빠 발을 닦았다. 특히 무좀이 심해서 고생하셨다는 발가락 사이사이를 더 ..
2008.05.13 -
2007.09.03 주사
2007.09.03 월요일 나는 심하게 몸살이 나서 학교까지 빠지고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주사를 한 대 맞고 약을 처방 해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왠지 모르게 주사란 말에 뜨끔하였다. 주사를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몇 년만에 맞아보는 거라서 좀 긴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와 함께 주사실로 들어갔다. 주사실 안에는 뚱뚱한 간호사 이모가 있었다. 간호사 이모는 "엉덩이에 맞을 것이니까 여기 엎드려 누워 주세요." 하셨다. 나는 부끄럽긴 하였지만 이모 말대로 주사실에 있던 작은 침대에 누워 엉덩이만 보이게 바지를 내렸다. 간호사 이모가 뾰족한 침이 달린 주사를 꺼내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모는 주사를 놓기 전에 엉덩이를 가볍게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주사 바늘을 내 오른쪽..
2007.09.03 -
2007.07.26 체르니 100에 들어 가다
2007.07.26 목요일 오늘은 왠지 피아노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오늘 바이엘에서 체르니 100과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피아노 학원에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너무나 기뻤다. 너무 기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날아가 버릴 뻔하였다. 그 동안 내가 체르니 100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연습을 해 왔던가! 비록 바이엘을 74번까지만 치고 체르니 100에 들어갔지만, 나는 바이엘을 친 그 기간이 100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바이엘이라는 작은 산을 넘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다른 거대한 음악의 산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언젠가는 그 모든 산들을 뛰어 넘어 피아노의 정상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체르니 100에, 우리 학원에서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들어간 아이..
2007.07.26 -
2007.07.24 취직하려고 메뉴판을 외우는 기분
2007.07.24 화요일 오늘은 여름 방학 첫 날, 학교 영어 캠프에서 특이한 걸 배웠다. 바로 맥도날드 메뉴였다. 치즈 버거, 프렌치 파이, 빅 맥, 치킨 너겟, 밀크 쉐이크, 햄버거, 선데이 아이스크림, 애플 파이 등이었다. 우리는 그걸 가지고 게임을 하였다. 무슨 게임이었냐면, 사이먼 선생님이 조마다 카드를 나누어 주시면, 그 카드를 섞어 뒤집어 놓고 한 조에 있는 사람들이 한 명, 차례대로 카드를 한 장 뽑아서 거기 '해브 송 햄버거.' 라고 써 있으면 카드 한 장을 뽑아서, 그게 햄버거 그림이 그려져 있으면 1점을 얻고, 다음 사람 차례로 넘어가지만 그 그림이 아니면, 그냥 아무 점수 받지 않고 다른 사람 차례로 넘어 간다. 그 게임을 할 때, 왠지 내가 맥도날드에 취직하려고 메뉴판을 외우는 ..
2007.07.24 -
2006.07.30 바다
2006.07.30 일요일 우리는 바닷가 갯벌 앞에서 준비 운동을 하였다. 팔을 허리 옆까지 대고 굽히기도 해보고 손을 무릎에 대고 굽혀 보기도 하였다. 우리는 바다 얕은 데서 깊은 곳으로 옮겨 갔다. 나는 개구리 헤엄을 쳤다. 나는 학교에서 방학을 하는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다. 껍데기를 벗으라고 였다. 껍데기란 공포심과 불쾌함 그리고 증오감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바닷물이 그걸 다 씻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학교 다닐 때 아이들이 나에게 욕을 하고 머리를 왜 때리는지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다. 항상 느리다고 어딜 가나 구박을 받다 보니 누가 날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슬픔과 분노가 차올라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린 스님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파도가 나의 그런 것들을 마그마가 물건을 녹이듯..
2006.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