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지하 세계

2008. 12. 27. 08:22일기

<어지러운 지하 세계>
2008.12.25 목요일

저녁 6시, 엄마랑 나랑 영우는 명동 지하상가 입구에서, 엉덩이에 불을 붙여 튕겨나가듯 차에서 내렸다. 외할머니와 6시에 롯데 백화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거의 다 와서 차가 꽉 막혀 옴싹달싹 못하길래, 내려서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 맞은 편에는 건물 벽 전체가 거대한 반짝이 전구로 뒤덮여, 물결처럼 빛을 내는 롯데 백화점이 서 있었다. 백화점 주변의 나무들에도 전구를 휘감아. 엄청난 반짝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백화점은 가까운 거리였지만, 도로를 꽉 메운 차들과,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이 없어서 잡힐 듯 말듯 멀어 보였다.

우리 뒤에도 역시 번쩍거리는 상가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앞으로 포장마차가 마치 이순신의 일자진처럼 모락모락 김을 뿜으며,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파헤친 개미집 안에 개미들처럼 바글바글 돌아다녔다. 엄마는 포장마차 줄을 따라 급하게 걸어가다, "이크, 여기가 아니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엄마를 놓치면 미아가 될 수도 있다. 잘 따라다녀라!" 하셨다.

우리는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 명동 지하상가 입구로 내려갔다. 하마처럼 입을 벌린 지하도 입구에서는, 사람들이 토하듯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많은 사람과 번쩍거리는 불빛에 밀려 눈이 어지러웠다. 이상하다! 우리가 차를 타고 달려왔던 도시의 거리는, 거의 문을 닫아 컴컴하고 춥고 썰렁하기만 했는데, 모두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왔나?

나는 깁스를 한 오른발을 밟힐까 봐, 긴장하며 엉거주춤 걷다가, 화가 난 듯한 기세로 계단을 올라오는 어른들과 이리저리 부딪히고 밀려서 자꾸 뒤로 올라갔다. 엄마와 영우가 계단 아래서 손을 잡고 걱정스럽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하상가 안에는 몸속에 난 핏줄처럼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었다. 여기는 정말 다른 세상 같았다. 번쩍거리는 옷가게, 보석 가게, 가구점, 레코드 가게, 별별 물건들이 다 아는 물건인데도, 생전 처음 보는 물건처럼 낯설고 신기하게만 보였다. 사람들은 벌과 개미처럼 쉬지 않고 지나다녔다. 여기서 백화점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하수도관으로 지어진 지하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 들며, 점점 정신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주춤거리지 말고 찾아보는 거야!' 마침 갈림길에 롯데 백화점이라고 쓴 표지가 눈에 띄었고, 지금까지 절뚝거리며 뒤처져서 걷던 나는, 엄마와 영우를 앞질러 나가며 말했다. "엄마, 이젠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할머니를 생각하며, 어깨를 펴고 힘차게 표지판을 따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