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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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싸움
2008.01.12 토요일 나는 아침부터 마음이 급했다. 어제 내린 눈이 그 사이에 녹아서 눈싸움도 못하고 눈사람도 못 만들면 어쩌나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공원으로 달려나갔는데, 눈이 다 풀밭으로 스며들어 아이스크림 녹은 것처럼 스믈스믈거렸다. 영우와 나는 울상이 되었다. 아빠가 "서오릉으로 가자! 서삼릉은 분명 사람들이 많을 테고, 서오릉은 아직 눈이 한창일 거야!" 하셨다. 과연 서오릉에 들어서니, 하얀 눈이 미끄러운 카페트처럼 펼쳐져 있고, 어떤 데는 발이 푹 빠지도록 깊었다. 우리는 눈이 더 많이 쌓여 있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굴려 몸통을 만들고, 영우가 머리를 얹어 붙이고, 주위에서 이것저것 재료를 찾아다가 꾸몄다. 내가 마른 솔잎 가지들..
2008.01.12 -
정글 소년 이발하기
2008.01.08 화요일 아빠와 나는 오랜만에 남성 전용 미용실 의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갔다. 주인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빠가 "저는 됐고요, 애를 좀 잘라주려고요. 머리를 길르려고 하는데, 너무 길어서 눈을 찌르네요. 앞머리하고 옆머리를 다듬었으면 좋겠네요." 하고 자세히 부탁하셨다. 나는 이발하면서 예전처럼 간지러움을 못 참고 웃음보를 터뜨리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무심코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미용사 아주머니께서 "아냐, 세 번째 자리에 앉아라." 하시면서 내 목에 넓은 보자기를 두르고 가위와 빗을 가져 왔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가위 모양으로 만들어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집어들고 가위로 한 번에 샥 잘라내었다. 창꼬치가 사냥을 할 때 한 번에 작은 물고기를 빨리 삼켜버리는 것처럼. 나..
2008.01.09 -
살맛 나는 거리
2008.01.07 월요일 며칠 동안 지겨운 감기를 앓으며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피아노 학원에 가려고 오랜만에 공원 길을 나섰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공기가 다르게 느껴져 살맛이 났다. 겨울 나무들이 빼빼 마른 가지들을 달고 잎도 없이 쭉 늘어서 있었지만, 그 위로 안개가 틈틈이 내려앉아 그 어느 때보다 꿈에 젖어 보였다. 새들도 가끔 날아와 깍깍 울었다. 나는 에 나오는 주인공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첫 번째 모험을 겪었던 곳인 꿈의 나라가 바로 여기 아닌가! 하는 생각에 푹 빠져있다가, 사람들이 덜컹덜컹 약수물통 끄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수터에는 물을 마시는 사람, 물통을 씻는 사람, 물 받으러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서 있다가, 내 차례가 되자..
2008.01.08 -
귀신 소동
2008.01.05 토요일 어제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를 앓고 있다. 그것은 잔물결처럼 시작해서 폭풍우처럼 거세졌다. 처음엔 잦은 기침이 헥켁켁 계속되다가,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 열이 나는 것이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코감기에 목이 심하게 부었다고 하시며 약을 처방해주셨다. 집에 와 약을 먹고 누웠는데도, 점점 열이 심해지면서 머리도 심하게 아파져 갔다. 열이 얼마나 끓어 올랐는지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고, 내가 만져서 손이 닿은 곳마다 불도장을 찍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나는 일어나 앉기도 힘들만큼 괴로웠지만, 이를 악물고 방안을 기어다니며 차가운 마룻바닥이나 소파 위에 몸을 문질러서 열을 식히려고 애썼다. 귀까지 먹먹하게 아파지자, 나는 덫에 걸린 호..
2008.01.05 -
편지
2008.01.02 수요일 오랜만에 추위가 녹은 잔잔한 날씨였다. 피아노 학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우리 집 우편함에 쌓여 있는 수북한 우편물 더미 속에서, 내 앞으로 온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크리스마스 때 내가 보냈던 편지에 대한 답장이, 어렸을 적 미술 학원 선생님에게서 온 것이다. 멋진 솔부엉이 우표도 함께 붙여져서! 선생님의 답장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신기하게도 미술학원 시절의 기억들까지 한장 한장 책을 펼치듯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 이야기가! 5살 때던가, 내가 처음 미술학원에 들어가 적응을 못 하고 낑낑대다가, 바지에 똥을 쌌을 때,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번쩍 안아 들고 수돗물로 닦아주셨던 기억부터, 7살 졸업반 마지막 사진 찍을 때까지 나를 돌보아주셨던 기억들..
2008.01.03 -
새해
2008.01.01 화요일 텔레비전 화면 구석에 작은 글씨로 50이라는 숫자가 떴다. 나는 그 숫자를 보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2007년 마지막 카운트 다운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보신각에 모셔진 커다란 종이 나타났고, 그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마치 하느님이 내려오길 기다리듯, 종을 향해 무언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카운트 다운이 40쯤 되었을 때, 나는 퍼뜩 상자에 들어 있던 인형들을 꺼내어, 쫘르르 텔레비전 앞에 앉혀놓았다. 그런 다음, 영우와 함께 그 사이에 끼어 앉아 새해야 오너라 하고 기다렸다. 아빠와 엄마는 새해 10초를 남겨두고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하셨다. 갑자기 보신각종 앞에 서 있던 어른들이 커다랗고 길쭉한 말뚝을 뒤로 밀었다가 앞으로 더 힘껏 밀어 종을..
2008.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