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싸움

2008. 1. 12. 21:28일기

<눈싸움>
2008.01.12 토요일

나는 아침부터 마음이 급했다. 어제 내린 눈이 그 사이에 녹아서 눈싸움도 못하고 눈사람도 못 만들면 어쩌나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자마자 공원으로 달려나갔는데, 눈이 다 풀밭으로 스며들어 아이스크림 녹은 것처럼 스믈스믈거렸다. 영우와 나는 울상이 되었다. 아빠가 "서오릉으로 가자! 서삼릉은 분명 사람들이 많을 테고, 서오릉은 아직 눈이 한창일 거야!" 하셨다.

과연 서오릉에 들어서니, 하얀 눈이 미끄러운 카페트처럼 펼쳐져 있고, 어떤 데는 발이 푹 빠지도록 깊었다. 우리는 눈이 더 많이 쌓여 있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굴려 몸통을 만들고, 영우가 머리를 얹어 붙이고, 주위에서 이것저것 재료를 찾아다가 꾸몄다.

내가 마른 솔잎 가지들을 듬뿍 줏어와 머리 위에 씌웠더니, 아주 특이한 모습의 눈사람이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졌다. 그건 마치 조금 잘생겨진 노트르담의 꼽추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왠지 정이 나서 자꾸만 "허험, 흐흠!" 하고 웃었다.

영우와 나는 계속 아빠 뒤를 쫓아다니며 눈을 뭉쳐서 던졌다. 처음에 아빠는 감기 들었으니까 아빠한테는 던지지 말라고 하시더니, 우리가 죽어라고 던져대니까 갑자기 홱 돌아서서 "오냐, 한번 붙어보자! 덤벼봐라!"하셨다.

그때부터 아빠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빠의 돌주먹 같은 눈덩이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얼이 빠질 정도였다. 아빠는 내가 도망갈 틈도 주지 않고 연속으로 눈 뭉치 세례를 퍼부었다. 어떻게 그렇게 빠르고 센지, 영우는 벌써 나가떨어지듯 눈밭에 누워버렸고, 나는 제대로 눈을 뭉쳐서 던져보지도 못한 채, 눈밭에 쓰러져서 이리저리 뒹굴며 눈뭉치를 맞았다.

누워서 팍팍 눈을 맞으며 데굴데굴 구르니, 눈 속에 파묻혀 꼼짝없이 잡힌 산짐승 꼴이 된 것 같아 수치스러웠지만, 그래도 재미있어서 배꼽이 떨어지도록 웃으며 "사람 살려!"하였다. 아빠가 나를 찍어 누르며 "이봐, 모범생, 공부를 택할 테냐? 눈싸움을 택할 테냐?" 물어보자, 나는 "눈싸움이요~!" 하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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