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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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할머니 집
2010.02.14 일요일 "상우야? 상우야? 깨야지?"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홍알홍알 잠결에 들려왔다. 나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내 눈앞에는 엄마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딱 붙어 계셨다. 엄마는 "어! 진짜로 일어났네!" 하시고서 나한테서 떨어져 이번에는 영우 옆으로 가셨다. 그런데 일어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정말로 푹 오랜만에 개운하게 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보통 축농증이라는 병이 있어 밤잠을 설치거나, 자고 일어나도 몸이 무겁고 어지럽거나 부스스한데, 할머니 집에 와서 자니 온몸이 개운한 게 너무 기분이 좋았다. "우와! 정말 개운하다!" 절로 감탄사가 입에서 나왔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이불 위에 짠! 하고 섰다. 방에 놓여 있는 책상 앞 닫힌 창문으로, 아름다운 빛..
2010.02.16 -
급하다 급해!
2009.09.17 목요일 학교 끝나고 돌아올 때 석희가 물었다. "상우야, 아까부터 왜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이니?", "으응~ 계곡에서 괴물이 나오려고 그러거든!", "그러면 우리 집에서 누고 가!" 나는 차마 석희네 집에서 실례할 수 없어서, 헤헤~ 사양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나를 기다렸던 가족들과 급하게 외출을 하느라, 화장실 가는 걸 잠시 잊어버렸다. 그리고 한 두 시간 쯤 흘렀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온몸이 배배꼬이며 배가 꽉 당겨오듯 아팠다. 나는 이예으호~ 이상한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계속 크게 다친 사람처럼 "으아으으!" 하고 탄식하자 가족들은 "상우야, 괜찮니?" 하고 물었다. 나는 "똥이 너무 마려워서 그래요! 아빠, 최대한 빨리 집에 가주세..
2009.09.18 -
산마을에 없는 것
2009.07.01 수요일 이틀 뒤면 있을 기말고사를 앞두고 나는 막바지 공부를 하였다. 사회 과목을 정리하다가 이라는 단원 중, 산촌에 관한 설명과 사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지난 주말에, 아빠의 친한 친구 분들 가족과 문경새재란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보았던 산마을의 모습과 사진이 똑 닮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배우기를, 우리나라의 촌락은 농촌, 어촌, 산촌으로 나뉘어 있고, 그중 산촌이 경치가 제일 좋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내가 가는 곳마다 시원하고 푸른 속리산 자락이 그림처럼 쫓아오고, 계단식 논밭에 심어진 키다리 옥수수와 산마을 허수아비가 나를 열렬히 환영하듯, 뜨거운 바람에 추와아~ 흔들렸다. 내 입에서는 오직 "우와~!" 하는 탄성만 가슴 밑에서부터 팡팡 터졌다. 그런..
2009.07.02 -
화장실에서 읽은 시
2009.03.10 화요일 급식을 먹고 나서 나는 2층 화장실로 향했다. 우리 학교는 층마다 화장실벽에, 액자에 시를 써서 걸어놓았는데, 난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골고루 돌아다니며 시를 읽는 걸 즐겼다. 단 2층 화장실은 한 번도 안 가봐서 오늘은 특별히 들러본 것이다. 세면대 위쪽에 붉은 보리밭 그림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시가 쓰여있었다. 나는 그 액자에서 가장 가까운 소변기에서 쉬를 하며 시를 읽었다. '여울에서 놀던 새끼 붕어, 다 커서 떠나고, 여울은 그때 그 또래 꼭 똑같네! 동네 아이들이 뛰어놀던 골목길, 아이들은 다 커서 떠나지만, 그 골목길은 그 또래 그대로이다!' 이 시를 읽고 나는 순간 멍해졌다. 뭔가 많은 느낌과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는 엄마 아빠 품에 잘 놀다..
2009.03.11 -
어린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9.02.28 토요일 드디어 피아노 학원 연주회 날이 열렸다. 점심을 먹고 학원에 모여 모두 버스를 타고 양주 문화 예술 회관으로 갔다. 햇볕은 따습고 바람은 쌀쌀했다. 공연장에 들어가니 내가 가장 고민하던 문제가 닥쳐왔다. 바로 연주할 때 입을 연미복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연주회 때 입을 옷에, 내 몸에 맞는 사이즈가 있을까?' 궁금했다. 지난해 피아노 학원 연주회에서는 겨우 맞는 옷을 찾기는 하였지만, 연주회 내내 너무 꽉 껴 숨이 막혔었는데... 남자 아이들은 공연장 복도에서 디자이너 아줌마가 옷을 나눠주셨다. 까만 바지는 그런대로 잘 맞고 시원하고 느낌도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윗옷을 벗으려는데, 그때 여자 아이들이 우르르 무엇을 물어보려고 몰려와, 나는 남자 화장실로 가서..
2009.03.03 -
이 때우기
2008.07.24 목요일 치과에 영우 앞니를 뽑으러 따라갔다가, 나도 간 김에 같이 검사를 받아보다. 그런데 뜻밖에 영구치인 어금니가 조금 썩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장 치료를 받기로 했다. 나는 병원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웠다. 의사 선생님께서 "마취하지 말고 그냥 하자!" 하며 이 때울 준비를 하고 계셨다. 나는 누운 채로 선생님을 흘깃 올려다보며 "아픈가요?" 하고 물었다. "아니, 아프지는 않지만 불편할 거야." 선생님은 입을 크게 '아' 벌리라 하고는, 말랑말랑한 초록색 천을 이 때울 자리만 남겨놓고 입안 전체에 착 덮어씌웠다. 그리고는 몇 번을 "더 크게 아~!" 한 다음, 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집게 같은 것으로 위아래 입술을 찝어서 고정했다. 그랬더니 나는 붙잡힌 상어처럼 입을 아 벌..
2008.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