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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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
2008.02.11 월요일 도롯가에 잎을 다 떨어뜨려낸 겨울 나무 줄지어 서 있네. 수없이 많은 나무 곁으로 차들이 쌩쌩 스쳐가네.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빼빼 마른 나뭇가지들이 힘겹게 떨고 있네. 이제 막 태양은 저물어 도로와 하늘은 포도색으로 물들고 수천 개의 은빛 핏줄처럼 뻗어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포도즙이 흘러내린 것처럼 스며들다가 곧 세상은 거대한 암흑으로 변한다. 나는 갑자기 길을 잘못 흘러든 것처럼 불안하다. 빨라지는 걸음 따라 노란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다. 저 높이 시커먼 나무 꼭대기에 무엇이 걸려 있네. 비닐봉지가 걸린 것일까? 작은 먹구름이 걸린 걸까? 올라가서 잡아보고 싶네. 꺾어놓은 나뭇가지를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듯 거칠고 칙칙해 보이지만 그렇게 아늑해 보일 수가 없구나! 나도..
2008.02.12 -
음악과 함께 떠나는 어거스트 러쉬의 모험
2007.12.07 금요일 를 보기 전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무슨 내용인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전에 읽었던 라는 책에서 내용을 알면 기대가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어거스트 러쉬가 넓은 초록색 갈대밭에서 두 손을 펼치고 흔들면 갈대들이 따라서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걸 보고, 나는 무슨 어린이 마법사 이야기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어거스트 러쉬는 마법사가 아니라 고아였고, 주위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느끼는 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비록 어거스트 러쉬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나도 가끔 공원에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바람 소리를 음악처럼 느끼고, 내가 바람과 함께 녹아 온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상상에..
2007.12.08 -
사탕
2007.11.28 수요일 학교에서 영어 특강이 있는 월요일과 수요일은 수업을 마친 후 교실 청소를 두 명씩 번갈아가며 하는데, 오늘은 5학년 예슬이 누나와 내 차례다. 누나와 나는 교실을 반으로 나누어 비질하였다. 나는 책상과 의자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먼지와 종이 쪼가리를 싹싹 쓸어담아 쓰레기통에 버렸고, 흐트러진 책상을 바로잡아 줄을 맞추었다. 청소가 끝나고 영어 선생님께서 잘했다고 막대 사탕 한 개씩을 주셨다. 나는 "고맙습니다!"하고, 사탕을 싼 종이 껍데기를 벗겨 잠바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사탕을 입에 물고 피아노 학원으로 가는데 사탕이 너무 달콤해서 나도 모르게 "음~"하고 눈을 감았다. 구슬 같은 동그란 사탕 알을 입 속에 넣고 굴려가며 먹었는데, 딸기 밀크 셰이크 맛이 혀끝부터 입 안..
2007.11.29 -
2007.08.02 혹독한 여름
2007.08.02 목요일 올여름은 잔인하다. 어떻게 비가 이토록 매일 매일 쉬지도 않고 내릴 수 있단 말인가? 햇빛을 보는 날보다 시커먼 구름 덩어리와 무겁게 쏟아지는 비에 갇혀 사는 꼴이 되어버렸다. 오늘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점점 거세져서 우리 집 창문 밖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우랑 나는 베란다 창이 보이는 마루에 모여 앉아 상을 펴고 비 오는 모습을 글로 써 보기 놀이를 하였다. 그러나 천둥 소리가 팡팡 터지고 번개가 하늘로 승천하는 용처럼 우르릉 치고 마침내 하늘이 뚫려 버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자, 영우와 나는 겁에 질려 글을 쓰다 말고 서로 놀란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 아파트가 폭풍우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다시 천둥이 치고 빗물이 온 세상을 뚜..
2007.08.02 -
2007.07.27 텐트
2007.07.27 금요일 드디어 우리는 동해안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고속 도로는 막히지 않았지만, 시커먼 야산을 따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며칠처럼 달려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가 지나서 바다고 뭐고 자는 것이 급하였다. 그리고 어렵게 어렵게 속초 해수욕장에 있는 오토 캠프장을 찾아 텐트를 쳤다. 이미 사람들이 좋은 자리는 다 차지해버려서 빙글빙글 돌다가 구석진 곳 네 그루의 앙상한 소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텐트를 치고 누우니 우리 집같이 안정되고 편안했다. 비록 텐트 지붕에 가려 별을 볼 순 없었지만, 왠지 하늘엔 별이 가득 총총총 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자꾸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 텐트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것은 보통 바람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겨냥해서 기습 공격을 하는 ..
2007.07.27 -
2007.06.04 지각
2007.06.04 월요일 아침에 눈을 떴더니 엄마가 졸린 목소리로 "아우, 상우야, 지각이다." 하셨다. 나는 너무 졸려서 그 소리가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뭐어?" 하며 시계를 보았더니, 8시 30분이었다. 나는 놀라긴 하였지만 그 때까지도 잠결이었다. 다급해진 엄마가 계속 "미안해." 하시며 나보다 더 허둥대셨다. 하지만 오히려 미안한 건 나였다. 어제 밤 엄마가 밤새워 작업하시는 동안 나도 그 틈을 타 몰래 책을 읽다 잠들었기 때문이다.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서 공원 길로 접어드는 순간 미지근한 온도의 끈적끈적한 바람이 불어 잠이 완전히 달아나면서, 나는 '에잇, 완전 지각이군!' 하며 난감한 기분과 후회가 뒤섞여 학교로 갔다. 오늘따라 학교 가는 길이 왜 이리 무거운지 마치 내가 피고가 되어..
2007.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