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6. 02:11ㆍ일기
<친구와 새옷>
2014.02.02 일요일
갑오년 새해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 만에 다시 맞는 갑오년! 갑오년 새해를 맞아 내가 제일 해 보고 싶은 것은 새옷을 사는 일이었다. 구정이 지나고 주머니에 불룩한 세뱃돈에 의지하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친구와 새옷을 사려고 나섰다.
난 지금까지 내 손으로 옷을 사 본 적이 한차례도 없다. 어떻게 입어야 보기 좋은지, 중고생이 입는 기본적인 옷의 종류를 어디서 사는지 알지 못했다. 함께 옷을 사러 따라와준 친구가 없었다면 정말 막막했을 것이다.
그 친구는 옷을 아주 잘 입는다. 나처럼 돈이 궁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멋부리는데 관심이 많은 친구였고 나의 비루한 옷차림을 보는 걸 괴로워하는 친구라서, 함께 가 옷을 골라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친구는 불광동 NC백화점을 적극 추천 하였다.
처음 백화점에 들어갔을 때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충격 받고 왜 괜히 오자고 했을까? 한숨이 나왔다. 매대에 알록달록한 통조림처럼 진열된 옷과 사진 속 화려한 모델들이 나의 스타일이랑 차이가 너무 심해 자괴감을 느꼈다. 나는 거울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에 옷 입는 거나 외모에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거울 보는 일이 즐겁지가 않고, 옷차림에 대한 신경이 선천적으로 둔해서 양말을 짝짝이로 신거나 여름에 겨울 옷을 입어도 불편함을 모른다.
그런데 백화점 이 장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곳곳이 거울들로 빼곡빼곡 차 있고 어딜가나 그 거울을 통해서 보기 싫은 나의 추레한 모습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짙은 다크서클에 여드름을 짜고 난 딸기같은 코끝, 삐죽삐죽 아무렇게나 솟은 머리, 검정색인데도 갈색 얼룩이 묻어 꼬질꼬질한 패딩잠바, 통이 넓어서 바람이 송송 들어오는 펑퍼짐한 바지, 신발끈 묶는 법을 잘 몰라 매듭만 대충 엮은 운동화의 신발끈, 그 모든 게 다 보기 싫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들은 대부분 중2 이전에 샀거나 물려받아 입었던 옷들인데, 중2 때 체중이 급격하게 줄어서 체형의 변화가 심한데도, 옷은 몸이 클 때 입던 옷을 그냥 입으니 잘 맞지 않고 엄청 헐렁거려서 옷에 몸이 푹 파묻힌 것처럼 보인다. 나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거울을 피해다니며 '언제까지 이 기분을 느끼고 살수는 없어!' 생각하고 친구에게 "뭐부터 사야할까?" 물었다. 친구가 몸 사이즈를 물었는데 모른다고 대답하니 친구는 잠시 입꼬리와 눈이 아래로 쳐졌다.
그러다 곧 원래 얼굴로 팽팽하게 펴지면서 "그래? 그럼 신발부터 사러 가자!" 하였다. "신발을? 난 신발 살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 옷을 사서 입어봤자 그 신발이랑 안 어울려! 그 형광색이 얼마나 못났는데!" 친구는 단호하게 나를 신발 매장으로 잡아끌었다. 내 운동화가 못났다구? 아빠가 사주신 신발인데... 나는 엄마, 아빠가 사다주신 운동화를 주로 신었고 밑창이 낡아질 때까지 신었는데, 한번은 운동화에 구멍이 나서 맞지 않는 아빠 구두를 급하게 신고 나가는 바람에 발이 막 하늘하늘거려서 고생한 적도 있다.
그런데 친구가 보여주는 신발은 평소에 내가 신던 넙적한 운동화랑 다르게 천도 얇고 밑창도 그냥 평평한 고무였다. "이 신발은 뭐라고 하니?" 묻자 친구는 "단화!"라고 했다. 나는 검은색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단화가 맘에 들었다. 곧 직원 아저씨가 창고에서 내 사이즈를 가지고 나왔고, 나는 그 신발을 신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분이 들떠 옷매장으로 향했는데 친구가 과감하게 추천해 준 옷은 아주 환한 시뻘건색 와이셔츠였다. 단추까지 빨간색이었다.
나는 반에서 찌그러져 조용하게 앉아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지, 수학여행에서 장기자랑에 나가는 아이가 아니다. 나는 투우사가 입는 것 같은 빨간 와이셔츠를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한번도 그렇게 튀는 색깔의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어!" 친구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나와 빨간 와이셔츠를 번갈아 눈대중을 하면서 "그럼, 이제 입어보면 되겠네!" 했다. 나는 빨간색을 피해 잽싸게 하얀색 와이셔츠를 집어들었다. "난 이게 맘에 드는데..." 그런데 친구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하는 소리가 "저거 옷감이 되게 얇아서 속에 뭘 바쳐입지 않으면 알몸이 다 비쳐!"였다.
나는 눈썹을 위로 당기며 얼른 하얀색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어두운 파란색을 가리켰다. "이건 어떠니?", "아, 네이비!" 나는 옷에도 네이비라는 색깔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어...응! 그거...", "야, 그거 예쁘네?" 나는 친구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걸 보니 그옷이 참 맘에 들었다. 딱히 더 볼 것도 없이 네이비색을 선택하자 친구는 비슷한 색감의 파란색 스웨터를 맞춰 입길 권했다. 바지도 요즘 유행하는 검정색 스키니진을 추천 했다. 친구가 추천 하는 옷을 모두 사고 그대로 입고 나오면서 백화점 안의 거울을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 올때는 푹 데친 시금치처럼 흐느적거렸던 내가 친구의 흐뭇한 표정 옆에서 어깨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저벅저벅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