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북인더갭>에 숨은 뜻

2013. 5. 12. 17:52일기

<출판사 북인더갭에 숨은 뜻>

2013.05.11 토요일


오늘은 중간고사가 끝난 주말이라 오랜만에 늘어지게 늦잠을 잤다. 눈을 뜨니 감기 기운 때문에 코가 막히고 온몸이 힘 빠진 고무줄처럼 이불 위에 푹 늘어진다. 다시 잠이 헤롱헤롱 들려고 하는 순간, 퍼뜩 오늘 북인더갭 출판사에 가기로 약속한 것이 떠올랐다. 나는 화다닥 화장실로 뛰어들어가며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상우야, 머리 감을 시간 없는데~ 약속 시간 늦겠다아~!"


나는 수도물을 틀어 머리에다 꽂아넣듯이 하고, 샴푸를 묻혀 주차작~ 주차작~ 머리를 감았다. 북인더갭은 일산에 있는데, 일주일 전 사무실을 다른 블럭으로 옮겼다고 한다. "엄마, 이사를 했으면 집들이 선물이 필요 해요!" 나는 들떠서 동네 시장 꽃집에서 꽃다발을 사들고 일산으로 향했다. 아빠는 힘차게 운전을 하셨고, 나는 처음 가보는 출판사의 모습을 여러번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주말인데도 비교적 차가 막히지 않았고, 일산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이라 일산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묘하게 설레었다.


지하철 역에서 가까운 오피스텔, 8층에 위치한 출판사 북인더갭을 우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북인더갭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이전에 북인더갭을 운영하는 분들을 만나보신 엄마, 아빠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인사 했다. 나는 그뒤를 뻘쭘하게 따라들어갔다. 김남순 실장님께서 활짝 웃으며 우리 가족을 반겨주셨다. 그뒤로 키가 크고 부드러운 인상의 안병률 대표님께서 "키가 많이 크네요!" 하며 반겨주셨다. 출판사의 대표님과 실장님하면 왠지 딱딱해 보이는데 두분은 부부셨고, 아빠, 엄마처럼 그냥 인상 좋은 아저씨,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성건아, 이리 와서 인사 해라!" 하셨고,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키 큰 초등학생이 퐁퐁퐁 내려와 수줍은 듯이 인사를 꾸벅하였다.


출판사 내부는 오피스텔 구조여서 좁다란 현관 복도를 지나면, 바로 커다란 책상 2개를 붙여 놓은 작업실로 이어진다. 복잡한 작업실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쓰는 곳 같았다. 책상 앞 서재 너머엔 큰 유리창이 시원하게 나 있어 아저씨, 아줌마는 가끔 날아가는 새를 보며 작업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아줌마는 내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다. <그들의 무덤은 구름속에>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표지만 봐도 애틋한 사연을 짐작할 수 있는,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야기였다. 나는 무지 어색하면서도 전혀 감정 표현을 못하는 얼굴로 얼떨떨하게 "감사합니다~" 하고 책을 넙죽 받아들었다.


나는 출판사에 오기 전부터 궁금했었던 특이한 이름, 북인더갭의 의미를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아저씨께서 "실장님께서 하신 생각이랑 다를 수도 있긴 한데, 제 생각에는 갭이 차이라는 뜻인데 이 사회 계층에는 차이가 있듯이, 책에도 계층 간의 차이가 있죠. 높은 계층이나 낮은 계층의 책은 많은 선호를 받는 반면에 중간의 갭을 이어주는 책들이 별로 없어서 서로 다른 계층을 이어주는 책들을 출판하려고 그렇게 지었습니다. 실장님은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실장님 아줌마는 웃음기를 머금고, "저도 비슷하게 생각을 하고요, 계층의 차이에 가려있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틈바구니 속의 좋은 책을 출판하려고 해요."하셨다.


북인더갭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 해주시는 아저씨, 아줌마의 대답에는, 상업적이기보다는 내용이 좋은 책을 출판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같은 게 묻어 있었고, 그 지혜로움에 두분의 눈이 맑아 보였다. 그리고 아줌마는 혹시 이런 쪽에 관심이 있으면 언제든지 조언을 구하라고 아저씨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내가 요즘 진로로 영문학 서적을 번역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니까, 아저씨는 기뻐하시며 "나는 독문학과를 나와서 독일 문학 번역을 하고 있어요. 이것은 얼마 전에 번역한 책인데, 상당히 지루하고 재미 없는 책이라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번역 일에 관심이 있다니까 줄 게요." 하셨고, 곧이어 아줌마가 책상 앞에 정면으로 꽂혀 있는 <특성 없는 남자>라는 두툼한 책을 건네주셨다.


아줌마는 "우린 출판사라 이런 것 밖에 드릴 게 없네요." 하시며 책을 멋진 황토색 큰 봉투에 담아주셨다. 아저씨께서는 이책을 번역하고 한동안 출간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전혀 감정 표현을 못하는 얼띤 얼굴로, 알러지로 목은 잠겨가지고 간신히 감사하다고 말은 했지만, '이게 웬일이야? 내가 이런 귀한 책을 받아도 되는지?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런 복을 받다니!' 마음 속에선 고래가 뛰어올랐다. 아줌마는 또 반가운 말씀을 하셨다. "이 건물 주변에는 밥집이 없어서 여기서 벗어나 점심을 먹죠. 차로 얼마 안 걸려요." 우리는 곧 일산 시내를 벗어나 가까운 풍동 애니골 식당가로 접어들었다. 구비구비 시골길을 따라 운동장처럼 드넓은 모래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민속촌이라는 거대한 기와집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인 할아버지가 안내해 준 넓은 사랑방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기가 무섭게, 한복을 입은 젊은 아저씨 두사람이 거대한 밥상을 양쪽에서 들고 어영차~ 우리 앞에 내려 놓았다. 언제 이렇게 뚝딱! 상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게 음식을 차렸을까? 취나물, 시금치 나물, 콩나물, 온갖 나물, 전, 조기, 깻잎, 동치미, 청포묵, 김치, 잡채, 계란찜, 연근, 밥, 된장찌게, 김, 조개젓, 돼지 장작구이, 누룽지까지 휴~ 눈이 빙그레 돌아가고, 아빠, 엄마의 감탄사가 들리고, 상다리가 무너지지 않을까 확인 해봐야 했다. 아줌마는 "이렇게 시골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직접 차린 건 아니지만 많이 드세요, 상우 아침도 안 먹고 왔다며 많이 먹으렴. 영우도 왔으면 좋았을 걸~" 하셨다. 특히 돼지 장작구이가 맛있었는데, 아저씨, 아줌마는 나 먹으라고 일부러 먹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어린 성건이까지도 띄엄띄엄 먹었다!


난 푸지게 빵빵하게 먹는데만 열중 했는데, 아빠는 기분이 좋았는지 엄마보다 더 수다를 떠셨다. 아빠와 엄마, 아저씨, 아줌마가 자식 키우는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허물 없는 이웃 형제 같았다. 우리가 모여 점심 식사 할 때에 마당에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은 눈이 아플만큼 쨍하고 빛나는데, 초록색 나뭇잎과 나뭇가지에 걸쳐 갈라지면서 쏟아져 들어와 그 빛은 참으로 시원해보였다. 나는 음식을 다 먹고나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며 마당을 산책 했다. '북인더갭 출판사는 즐거운 가정이었구나. 성건이는 게임도 안하고 책을 좋아하는 부모님 밑에서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잘 자라고 있구나.' 어느새 나도 모르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즐겨하던 피노키오 걸음을 뛰기 시작했다. 온몸의 관절이 목각 인형이 됐다는 생각으로 관절을 마구 흔들면서, 한발로 땅을 한번 짚을 것을 두번 짚어가며 콩콩 뛰기를 하다보니, 축지법을 쓴 것처럼 멀리까지 내달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