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의 여왕

2009. 6. 25. 09:02일기

<달리기의 여왕>
2009.06.24 수요일

1교시 체육 시간, 우리 반은 여느 때처럼 운동장에서 단계별로 기초 운동을 시작했다. 우리는 요즘 한창 기말고사 준비를 하느라 피곤한 탓인지, 모두 찌뿌드드한 표정으로 기초운동을 해나갔다.

게다가 날씨는 어떤가? 습기 한 점, 구름 한 점 없고, 따가운 햇볕에 닿는 부분은 살이 타들어가 까맣게 재가 되는 것 같았다. 특히 철봉을 만질 땐 불로 달군 쇠를 잡는 것 같이 코끝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체육 선생님께서는 시들시들 시금치처럼 늘어진 우리를 모이게 해서, 남자, 여자 나란히 줄을 세워 운동장 중간으로 데려가셨다. 그리고는 앞줄에 선 아이들이 "이어달리기를 해요~"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는 곧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제발 안돼! 얘들아, 이어달리기만은~ 너희들 나 때문에 진다고!" 나는 머리를 움켜잡고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잠시 돌이 돼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어제 본 뉴스를 떠올렸다. 존엄사를 시행하려 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계신 김씨 할머니를 생각하고, 다시 일어서 태양을 마주했다. 그러나 몸이 타버릴 것 같은 더위에 대한 공포심과, 이어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못 이겨, 나도 모르게 운동장 맨앞에 있는 연설대와 스탠드 사이, 눈에 띄지 않는 그늘로 도망을 쳤다.

연설대 벽에 등을 기대 잠시 쉬었다가  슬그머니 나왔을 땐, 아직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나를 발견한 몇몇 아이들이 달려와, 어깨동무하듯 내 목을 끌고 떠밀며 달리기 출발선 앞으로 데려가 세웠다. 마침 남자 여자 이어달리기 마지막 순서였는데, 하필 내 상대는 여자 계주 선수 승희였다. 남자 중에 제일 빠른 성환이랑 겨루어도 뒤처지지 않고, 더 빠를 때도 있는 그 악명높은 이승희!

드디어 바톤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바짝 긴장이 되어 '차라리 중간에 뛰다가 일부러 넘어져 버릴까?' 생각도 하였다. 나는 열심히 뛰었다. 추월당할 때 당하더라도, 무조건 달려보자! 나는 얼마 동안 앞서 나가 뛰었다. 그리고 이승희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것을 알고서 더 힘을 내었다. 이기지는 못해도 끝까지 달릴 거야!

이승희는 코뿔소같이 씩씩거리며 뛰는 나를, 결승선에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가볍게 앞질러 나가며, 고개를 돌려 나에게 혀를 쏙 내미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승희는 그 특별한 긴 다리로, 거의 백팔십도에 가까운 환상적인 보폭을 벌리며 결승점으로 들어갔다. 이승희가 나를 앞지른 순간 나의 달리기도 끝이 났다. 타고난 달리기 선수와 타고나게 달리기를 못하는 내가 펼친 대결은 그리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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