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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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그릇
2008.10.14 화요일 1교시, 선생님께서 "오늘 미술 수업을 야외에서 할까? 안에서 할까?" 하시자, 아이들은 귀청이 떨어져라, "야외에서 해요!" 하고 소리 질렀다. 해는 반짝 나고 하늘은 높고, 풀밭은 촉촉하고 나무는 울긋불긋 빛났다. 우리는 운동장 스탠드에 모여 앉아 수업 준비를 했는데, 꼭 높은 산에 올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 준비해온 찰흙을 꺼내어 조물딱 조물딱 만들기를 시작했다. 옆에 앉은 석희는 찰흙을 가져오지 않아서, 선생님께서 한 덩이씩 나눠주신 것으로는 턱도 없이 모자랐다. 마침 난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넉넉히 준비해 온 찰흙을 석희에게 자랑스럽게 뜯어주었다. 난 크고 넓적한 국수 그릇을 만들었다. 크게 만들다 보니까 너무 얇아져서 잔금이 쩍쩍 나는 것이었다. 잔금에 자꾸 ..
2008.10.15 -
안개를 헤치며
2008.10.09 목요일 오늘 아침은 안개 때문에 숨이 막혔다. 아파트 입구를 벗어나 곧게 뻗은 통학 길을 따라 걷는데, 차가 다니는 길을 끼고 오른쪽에 마주한 아파트 3,4단지가 아예 보이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어도 답답했다. 안개 괴물이 세상을 집어삼킨 건 아닐까? 자세히 보니 아파트 아랫부분은 조금 보였지만, 안개가 많이 낀 아파트 위쪽은, 뿌연 구름이 걸려 버린 것처럼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컴퓨터 게임에서 본 하늘성 (제9의 사도 바칼이, 하늘 세상을 지배하려고, 바다 마을에서 계단을 이어서 하늘까지 쌓아올린 탑) 같았다. 사방을 둘러싼 안개속에서 학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와~ 안개 정말 짙다! 이거 천재지변 아니야?" 바로 코앞에 아이는 보였지만, 멀리 앞서가는..
2008.10.10 -
암에 걸린 할머니
2008.10.05 일요일 며칠 전부터 나는 우울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대구에 입원해 누워 계신 할머니를 만나러 가셨기 때문이다.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직 남은 감기 기운이 할머니께 좋지 않을까 봐 참고 다음번에 찾아뵙기로 하였다. 할머니가 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는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그리고 '분명 이건 꿈속에서 들은 소식일 거야. 이 꿈이 깨면 나는 침대에 누워 있을 거고, 학교에 가야 할 거야, 그러면서 나는 휴~ 내가 악몽을 꾸었구나! 하고 안심할 거야!'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나는 3년 전 외할아버지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가슴이 무너지듯 놀랐다. 다행히 외할아버지는 고비를 넘기셨고, 꾸준히 치료를 받아 지금은 많이 ..
2008.10.07 -
교실에 찾아온 숭어
2008.10.01 수요일 나는 어제 감기가 심해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쌀쌀한 아침, 쿨룩쿨룩 기침이 터질 때마다, 물병에 담아온 보리차를 마셔가며 걸었다. 우리 반 교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서 리코더 합주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건 우리 반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상하다! 오늘은 리코더 가져오는 날이 아닌데?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전부 리코더로 슈베르트의 '숭어'를 불고 있었고, 선생님께서 우드블록으로 딱딱 박자를 맞춰주고 계셨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니까 우리 모둠 아이들이 "오늘 지금까지 우리가 연습한 숭어, 촬영하는 사람들이 와서 찍는 날이야!" 하였다. 우리 반은 지난 4개월 동안 음악 시간과 쉬는 시간, 짬짬이 '숭어'를 리코더로 연습해왔다. 학교 예능 행사로 연습해왔는데, ..
2008.10.02 -
백군, 이겨라!
2008.09.26 금요일 "뎅~" 하는 징소리와 함께 여자 청백 계주가 시작되었다. 우리 반은 백군 스텐드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판사들처럼 진지하게 청백 계주를 지켜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종알종알 말들이 많아지더니 여기저기 응원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초반에 백군이 이기다가 갑자기 청군 선수가 역전하자, 아이들의 반응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야! 그걸 역전당하면 어떡하냐?"하고 소리소리 지르고,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일어나 "백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하고 외쳤다. 그리고 벌써 이긴듯이 사기가 올라간 청군 응원단을 향해, 엄지손가락 두 개를 아래로 내려서 "청군 우~!" 하였다. 나도 따라 벌떡 일어나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렀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 왔어요! 청군이 이겼다고 전화 왔어..
2008.09.29 -
신데렐라 선생님
2008.09.25 목요일 내일이면 드디어 가을 운동회다. 어제 총연습을 마쳤고, 그동안 분주했던 학교는 싸늘해진 날씨와 함께 차분한 수업 분위기를 맞았다. 마지막 5교시 과학 수업 시작하기 전, 갑자기 선생님께서 동영상을 틀어주시면서 "자, 이거 영어 연극인데, 잘 듣고 영어를 익혀 보세요! 이 연극은 신데렐라예요!" 하셨다. 연극의 배경은 우리 학교 시청각실이었고, 처음 무대 커튼 앞에서 학생복을 입은 어떤 여자가 나타났다. 검은색 구두 한 짝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코를 막고 무언가 찾는 듯이 영어로 중얼거렸는데, 대번에 우리 학교 선생님이란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선생님들께서 꾸민 영어 연극이구나! 하는데, 무대 커튼이 열리고 어떤 사람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우리 반 ..
2008.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