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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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아이
2014.11.19 수요일 춥다, 춥다, 으드드드~ 또 춥다. 입술이 얼어붙고 손가락은 시들어버린 시금치처럼 파랗다. 처음엔 팝콘 튀겨내는 기계처럼 몸을 떨며 걷다가 이제는 삐걱거리며 집을 찾아 헤맨다. 사람들이 나한테 시린 얼음물을 쉴새 없이 뿌리는 것처럼 춥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까지 통으로 얼어버린 듯, 알고 있는 단어는 오로지 '춥다'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난생처음 와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 앞으로 걷기만 했다. 왠지 집이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자꾸 걸어보지만, 걸을수록 허탕인 길을, 머리가 너무 얼어서 다시 새로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추위가 뼈 마디마디 스며들어 손가락은 까딱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유일하..
2014.11.24 -
위험한 실험
2010.06.14 월요일 4교시 과학 시간에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은 간이 산소 발생기를 만들어, 산소가 없을 때보다 산소가 많을 때 연소가 잘되는 성질, 즉 산소의 촉매작용을 알아보는 실험이다. 실험대에 유리 깔때기를 매단다. 유리 깔때기 주둥이에 고무 튜브를 끼워서, 아래에 있는 삼각 플라스크의 주둥이에 꽂아 연결한다. 그리고 튜브 중간에는 집게 모양의 핀치를 달아서, 과산화수소수가 알맞게 들어갈 수 있도록 조절해준다. 삼각 플라스크에는 오른쪽으로 주둥이가 하나 더 달렸는데, 그것도 고무 튜브를 연결해서 ㄱ자 유리관과 연결한다. ㄱ자 유리관은 물을 가득 채운 수조에 넣는다. 그리고 물을 가득 채운 집기병을 수조에 거꾸로 세우고, ㄱ자 유리관을 그 틈에 넣는다. 이번엔 아까 맨 처음, 유리..
2010.06.15 -
황사 탈출하기
2010.03.20 토요일 나는 오늘 학교에서, 집에 어떻게 가나 내내 걱정이 되었다. 황사 때문에 교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온통 끔찍하게 노란색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 끝날 시간이 되어서는, 하늘과 나무도 생명을 잃고 이 세상의 모든 게 다 기울어가는 것처럼, 노란색에서 더 진하고 기분 나쁜 뿌연 똥 색으로 뒤바꿔져 있었다. 학교가 끝날 때에는 집에 오는 게 겁이나, 학교에 조금 더 남고 싶었지만, 석희와 함께 마스크 안에 물 적신 휴지로 입을 가리고 현관을 나왔다. 학교 밖의 분위기는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전쟁이 일어난 모습 같았다. 하늘은 온통 황토색에, 황사 그치는데 별로 도움을 주지도 않는 빗방울이 가끔 툭, 툭~ 떨어졌다. 아이들은 꼭 도망치는 행렬처럼 이어져서 가고 있었다. 석희는 ..
2010.03.21 -
기적의 태양
2009.12.03 목요일 5교시 과학 시간 그렇게 기다려왔던, 우리가 사는 태양계를 배우는 우주 단원에 처음 들어갔다. "모두 과학책 65쪽을 펴세요!" 하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아이들은 모두 매끄럽게 수루락~ 책을 펼쳤다. 우주 단원의 첫 장은, 보석처럼 총총총 우주에 박힌 별들과 인공위성, 그리고 가장 멀리에서 찬란한 빛을 비추는 태양이 있는 그림으로 시작하였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마치 내가 우주선의 해치를 열고 우주와 맞닥뜨린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선생님께서 리모컨을 멋지게 잡고 TV 화면 쪽으로 손을 쭉 뻗어 버튼을 누르셨다. TV에는 과학책과 비슷한 그림이 떴다. 선생님이 바로 의자에 앉아 컴퓨터 마우스를 토돗~ 네 번 누르시고 나니까, TV 속 그림 위에 노란색 네 가지 글귀들..
2009.12.05 -
헌법재판소 판결처럼 우울한 날씨
2009.10 31 토요일 점심을 먹고 축농증 치료를 받으러 상가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제까지 아파트 단지마다 붉고 노란 나뭇잎이 땅바닥에 가득 뒹굴었고, 나뭇가지에도 빨간색 등불을 켜놓은 것처럼 예뻤는데, 오늘은 다르다. 오전부터 내리던 비가, 그동안 가을을 지켰던 풍성한 나뭇잎을 한 잎도 남기지 않고 모두 떨어내버렸다. 그래서 나뭇가지들은 바짝 말라서 쪼글쪼글해진 할머니 손처럼, 또는 X레이에 찍은 해골의 손뼈처럼 가늘가늘 앙상하다. 내가 조금만 건드려도 톡 부러질 것 같다.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밝혀주었던, 가을의 빨간 축제가 매일 열리던 길목은 이제 끝났다. 내가 걷는 길은, 차가운 비가 투툴투툴 내리는 추억 속의 쓸쓸한 길이 돼버리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산 속에서 햇빛을 못 받아 어..
2009.11.01 -
시간이라는 선물 - 2008년을 보내며
2008.12.31 수요일 2008년이 몇 시간 안 남았다. 나는 두 손을 깍지껴서 머리 뒤에 베개 삼아 고이고, 몇 시간째 방바닥에 꼼짝않고 누워있다. 그러면 2008년에 있었던 일들이 오래된 영사기로 돌리는 영화처럼 천천히 차르르르~ 눈앞에 흘러간다. 어떤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보가 쿡 터지고, 어떤 장면에서는 얼굴이 찡그려지고, 어떤 장면에서는 '아!' 하고 탄성이 나온다. 2008년은 나에게 너무 많은 추억을 선물하였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그냥 이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밖에 없구나! 이제 다시는 못 볼, 내가 살아가는 시간 중에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해로 남을지도 모르는 2008년을 보내야 한다. 서서히 작동이 멈춰가는 배를 떠나, 새로 항해할 수 있는 배로..
2008.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