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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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의 우리 할아버지
2011.04.06 수요일 케이크는 아담한데 나이가 많아서, 초를 꽂아놓을 자리가 빡빡했다. 오히려 케이크보다 초가 위협적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문득 슬픈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78세가 되어서, 내 생일 케이크에 더 초를 꽂을 자리가 별로 없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기분이 우울할까? 오늘은 우리 외할아버지의 78번째 생신이다. 할아버지는 인생을 아주 검소하게 사셨고, 그래서 자식들이 칠순 잔치해주는 것도 거절하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반찬 한번 바꾸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오늘 맞는 생신은 우리가 함께 살고 있으므로, 거창하지는 못하더라도 진심을 담아서 정성껏 축하해드리고 싶었다. 평소에 뇌경색이라는 병을 앓고 계셔서 표정이 굳으셨고 말씀도 잘 못하시지만, 언제나 우리를 걱정해주시고..
2011.04.07 -
영풍문고에서 터진 코피
2011.01.03 월요일 "큼, 킁~!" 갑자기 코가 간지럽고 촉촉했다. 그리고 콧물 같은 것이 조금 새어 나왔는데, 콧물보다는 더 따뜻하고 더 끈끈하지 않고 물 같았다. 나는 왼손 검지 손가락으로, 물이 새는 것 같은 왼쪽 콧구멍을 살짝 훔쳤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진한 빨간색 액체가 왼손 검지에 묻어나왔다. 그리고 이내 방울방울 눈물처럼 흐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왜 코피가 나는 것일까?' 가장 먼저 이 생각부터 들었다. 어젯밤 새벽 3시까지, '아홉살 인생', '아르네가 남긴 것', '별을 헤아리며'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살짝 감기 기운도 있는 듯 피곤하고 몸이 매우 무거웠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책을 읽는 중에도 살짝 코피가 났었다...
2011.01.04 -
이름 없는 삼계탕 집
2010.07.25 일요일 오늘은 8월에 이사할 할머니 댁에 겨울옷을 정리하러 갔다. 옷걸이를 설치하고, 그 많은 옷을 걸어놓는 일은 가족이 도와가며 하니, 착착 진행되어 빨리 끝났다. 일이 끝나고 할머니께서는 더운 날씨에 우리 몸보신 하라고, 유명한 삼계탕을 사주신다고 하였다. 토속촌은 할머니 댁에서 몇 골목만 돌아가면 나오는 곳인데, 작년 이맘때도 사주셔서 그 맛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맛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이 멀리서도 찾아온다. 먹는 데는 아주 오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지만, 그 맛은 시간이 아깝지 않은 맛이다. 그렇지 않아도 삼계탕 노래를 불렀던 나와 영우는, 골목길을 힘차게 폴짝폴짝 앞서서 걸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골목이 나왔다. 그 골목에..
2010.07.27 -
다시 만난 학교
2010.02.02 화요일 오늘은 드디어 개학을 하는 날이다. 이번 방학은 유난히 길고도 짧았다. 오랜만에 아침 시간에 밖에 나와서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니, 폐가 갑자기 첫 숨을 쉴 때처럼 놀라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오후에만 나다니다가 갑자기 아침에 나와서 그런지, 바람이 볼을 찰싹찰싹 쓰라리게 하고, 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소매하고 품 안으로 바람이 어느새 들어와 있었다. 5단지에서 나오니 꼭 동물들이 대이동을 하듯이, 삼숭초등학교 학생들이 한길로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은, 심장이 뛰도록 흥겹고 신이 났다. 바람이 매섭게 핏발이 선 날씨였지만, 나와 같이 배우러 가는 친구와 학생들이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 언덕 밑 교문에서는 1,2단지 쪽 횡단보도에서 건너오는 아이들..
2010.02.04 -
끝장나게 추운 날
2009. 12.15 화요일 계단 청소를 마치고 교실을 나섰는데, 이미 아이들은 집에 가고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복도 창틈마다 차가운 바람이 위이잉 하고 새어나올 뿐! 바람은 복도를 물길 삼아 돌다가, 가스가 새듯이 흘러들어 복도 안을 불안하게 워~ 돌아다녔고, 나는 이 바람이 몸을 스르륵 통과하는 유령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을 때, 내 몸은 눈사태 같은 추위에 파묻혀버렸다. 나는 추위에 쪼그라든 몸을 최대한 빨리 일으켜 얼음처럼 딱딱한 신발을 후닥닥 갈아신었다.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내려갈 때 내 몸은, 바람에 밀리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바람을 가르는 운석처럼 타타타타~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정문은 괴물처럼 입을 쩍 벌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바람을 쿠후우..
2009.12.16 -
던져라, 눈 폭탄!
2009.01.17 토요일 나는 오후 늦게 영우와 집 앞 놀이터로 나갔다.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으니 너무 행복해서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뽀드득 치익~ 내리막길을 미끄러지자, 놀이터 입구에 우뚝 솟은 오두막 집이 보였다. "어! 저기 경훈이다!' 나는 오두막 옆쪽에서 걸어나오는 친한 친구, 경훈이와 동생 지훈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나와 영우는 "툭 파사사~" 눈길을 제치고, 경훈이와 지훈이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우리가 달려오는 걸 알아차린 경훈이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지훈이에게 말했다. "쟤네들 분명히 우리한테 눈 던진다!" 경훈이 말이 딱 맞았다. 나는 경훈이에게, 영우는 지훈이에게 눈 뭉치를 던졌다. 내가 던진 눈이 경훈이 잠바에 "펑~!" 맞으며, 경훈이가 "오메~!" 하고 소..
2009.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