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세의 우리 할아버지

2011. 4. 7. 09:03일기

<33세의 우리 할아버지>
2011.04.06 수요일

케이크는 아담한데 나이가 많아서, 초를 꽂아놓을 자리가 빡빡했다. 오히려 케이크보다 초가 위협적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문득 슬픈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내가 78세가 되어서, 내 생일 케이크에 더 초를 꽂을 자리가 별로 없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기분이 우울할까?

오늘은 우리 외할아버지의 78번째 생신이다. 할아버지는 인생을 아주 검소하게 사셨고, 그래서 자식들이 칠순 잔치해주는 것도 거절하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반찬 한번 바꾸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오늘 맞는 생신은 우리가 함께 살고 있으므로, 거창하지는 못하더라도 진심을 담아서 정성껏 축하해드리고 싶었다. 평소에 뇌경색이라는 병을 앓고 계셔서 표정이 굳으셨고 말씀도 잘 못하시지만, 언제나 우리를 걱정해주시고, 우리가 할아버지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해도 많이 웃으신다. 10일 후에는 할머니의 칠순이어서 요즘 할머니만을 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이 할아버지의 생신인 것은 솔직히 아침에서야 알 수 있었다.

학교에 다녀와서 잠깐 친구와 산책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할머니와 엄마는 식탁을 차리고 계셨다. 고소한 잡채 냄새와 향긋한 미역국 냄새가 부엌 가득 퍼졌다. 아주 소박하지만,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음식으로 식탁이 차려지고, 그 가운데에는 엄마가 할아버지를 위해 사오신 고구마 케이크로 장식하였다. 엄마가 케이크에 초를 하나, 둘, 셋, 계속 꽂았지만, 그래도 아직 할아버지 나이에는 모자랐다.

그런데 그 초를 하나하나 꽂는 시간이 꽤 길게 느껴지며,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길고 긴 인생을 얼마나 힘들게 사셨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초를 꽂을 자리가 모자라 케이크 가장자리를 쑤시는 엄마에게, 나는 문득 "엄마, 초 그만 꽂는 게 좋지 않을까요?" 했다. 할머니께서도 "아, 그냥 아무렇게나 꽂아! 어차피 서양 문물인 걸!" 하셨다. 나와 엄마는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냥 잡히는 대로 케이크에 박힌 초를 뽑기 시작했다.

초 한 개! 초 두 개! 케이크에서 뽑혀 나오는 초를 보며, 나도 할아버지 마음에 박힌 못들과 응어리를 모두 풀어 드려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평생 공부만 하고 힘들게 살아오셨고, 몇십 년 동안 바뀌지 않는 반찬에도 불평 한번 안 하시는 우리 할아버지께 나도 별로 평소에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맘에 걸렸다. 케이크에 있는 빽빽하게 박혀있는 초를 넉넉히 빼고 나니, 큰 초가 3개, 작은 초가 3개 남았다.

엄마는 "그냥 이대로 남겨두자.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신이 나서 "할아버지 나이가 아주 젊어졌어요!" 외쳤더니,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웃으셨다. 나와 엄마, 할머니, 영우는 할아버지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할아버지에게 생일 선물 하나 못 해 드린 게 죄송하여서, 오늘 국어 시간에 배운 김영랑 시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를 노래로 불러드렸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영우는 할아버지의 건조하고 거칠거칠한 볼에 "할아버지, 사랑해요!" 하며 입을 맞추어 드렸다.

33세의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