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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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과서 받는 날
2009.12.19 토요일 아침에 중이염과 축농증이 다시 겹쳤다. 머리가 어지럽고 목이 붓고, 기침이 쉬지 않고 커헉~ 커어~! 터지면서, 결국 제시간에 등교를 하지 못했다. 학교에 간신히 전화를 하고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늦은 3교시 시작할 때서야 나는 학교에 도착했다. 내가 쉬지 않고 학교에 간 이유는, 오늘 새 교과서를 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책도 좋지만, 매년 새 교과서를 받는 일은, 큰 상을 받는 것처럼 가슴을 뛰게 했다. 나는 흐음 후, 흐음 후~ 가쁜 숨을 내쉬며, 계단을 올라 복도를 따라 절름절름 교실 앞에 도착했다. 목을 가다듬고, 장갑을 껴서 미끄러운 손으로 교실 뒷문의 금빛 문고리를 꽉 잡고 서서히 돌렸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빼끔 열렸다. 나는 그리로 ..
2009.12.21 -
끝장나게 추운 날
2009. 12.15 화요일 계단 청소를 마치고 교실을 나섰는데, 이미 아이들은 집에 가고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복도 창틈마다 차가운 바람이 위이잉 하고 새어나올 뿐! 바람은 복도를 물길 삼아 돌다가, 가스가 새듯이 흘러들어 복도 안을 불안하게 워~ 돌아다녔고, 나는 이 바람이 몸을 스르륵 통과하는 유령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을 때, 내 몸은 눈사태 같은 추위에 파묻혀버렸다. 나는 추위에 쪼그라든 몸을 최대한 빨리 일으켜 얼음처럼 딱딱한 신발을 후닥닥 갈아신었다.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내려갈 때 내 몸은, 바람에 밀리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바람을 가르는 운석처럼 타타타타~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정문은 괴물처럼 입을 쩍 벌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더 큰 바람을 쿠후우..
2009.12.16 -
쉬는 시간의 풍경
2009.12.01 화요일 2교시에 있을 한자 인증 시험을 앞두고, 우리 반은 여느 때와 같이 쉬는 시간을 맞았다. 기말고사가 끝나서 긴장이 풀렸는지 한자 공부하는 아이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면 나만 빼고 모두 시험 준비를 마쳐서 자신에 넘쳐 있거나! 나는 문제지에 나온 한자 위에 손가락을 대어 덧써보다가, 아이들이 너무 자유롭고 신나게 노는 걸 보고, 나만 이러고 있는 게 잘못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의자를 앞으로 밀어 넣고 교실 뒤로 걸어나간다. 원래 미술실이었던 우리 교실 뒷부분은 다른 반 교실보다 엄청 넓다. 그중 제일 오른쪽 구석 바닥에 처박히듯 털썩 주저앉는다. 나는 옷 뒤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벽에 기댄 자세로 느긋하게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2009.12.02 -
의인법에 무너지다
2009.06.17 수요일 오늘 낮 우리 학교 강당에서, 방송국에서 나와 '퀴즈 짱'이라는 프로를 녹화하였다. 학교별로 퀴즈 대회를 열어서 우승자를 뽑고, 우승자들끼리 모여 왕중왕을 가리는 TV프로라고 한다. 난 방송국에서 나누어 준 모자를 쓰고 맨 앞줄에 앉았다. 행운의 7번을 달고! 4, 5, 6학년 100명이 모여 시작했는데, 어느덧 자리는 깎아버린 잔디처럼 듬성듬성 비어가고, 16명 정도가 남았다. 나는 내가 여기 끼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아무런 대비 없이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이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진행 중간마다 아나운서 아저씨가 "와~ 이름이 정말 멋있네요!" 하며, 내 이름이 어떤 유명 배우랑 같은 것을 강조했고, 아이들이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우와~ 탄성..
2009.06.19 -
김포공항에서
2008.09.20 토요일 오후 6시, 우리 가족은 김포공항 출구에서 큰삼촌 가족을 기다렸다. 큰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조카 진우는 제주도에서 5시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큰삼촌 가족은 제주도에 사셔서 자주 뵙지를 못한다. 하나밖에 없는 외사촌 동생 진우는 올해 5살인데, 돌잔치 때 보고 나서 4년 만에 만나는 거라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걸어나오는 문 앞 기둥에 기대어서, 뒷짐을 지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기다렸다. 영우는 사람들이 나오는 자동문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가 경비 아저씨에게 불려 나왔다. 나도 가까이 가서 유리문에 코를 대었다가 역시 아저씨에게 뒤로 물러나란 소리를 들었다. 도착 예정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삼촌 가족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엄마는 비가 와서 ..
2008.09.25 -
꼴찌를 위하여
2008.05.06 화요일 5일간에 기나긴 휴일이 끝나고 다시 학교 가는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운동회 날이기도 하고! 무거운 책가방은 벗어던지고, 모자를 쓰고 물병만 달랑 손에 들고 가니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붕 뜨는 것 같았다. 아직 교실에는 아이들만 몇몇 와있고, 선생님은 안 계셨다. 나는 김훈이라는 아이와 미국 광우병 수입 소 이야기로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선생님께서 쌩하고 들어오셔서 칠판에 '운동장으로 나가기'라고 적어놓고 다시 급하게 나가셨다. 운동장에는 벌써 많은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우리는 교장 선생님 연설을 듣고, 국민 체조를 하고 본격적으로 운동회에 돌입하였다. 오늘은 소 체육대회라서 그렇게 많은 행사는 없었다. 줄다리기, 각 반에서 모..
2008.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