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 푹 빠진 날

2010. 1. 6. 09:01일기

<눈 속에 푹 빠진 날>
2010.01.04 화요일

저녁 8시, 나는 영우와 함께 심부름을 하려고, 아파트 단지에 산처럼 쌓인 눈길을 헤치고 상가로 내려갔다.

매일 보던 길이지만, 폭설에 잠겨서 처음 보는 곳처럼 낯설었다. 우리는 새하얀 눈의 행성에 처음 도착한 우주인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저부적, 저부적~ 소금같이 수북하게 쌓인 눈 속을 걸어나갔다.

눈길은 가로등과 달빛에 비교도 안되게 하얀 운석처럼 빛났다. 눈이 적당히 쌓이면 환상적일 텐데, 도로를 포장한 듯 덮어버리니 어디를 밟아야 할지 분간이 안돼서 걸음이 위태위태했다.

그런데 마침 내가 맘 놓고 걸어보고 싶은 길이 눈에 띄었다. 그곳은 원래 차도와 인도 사이에 화단을 심어놓은 넓은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겨울이라 비어 있고, 눈이 아이스크림처럼 푸짐하게 쌓여 있었다. 옆에 차가 많이 달리면 위험하겠지만, 찻길도 얼어붙은 눈길이라 텅 비어 있다. 나는 끌리듯 그리로 발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눈 표면에 뽁! 하고 발이 빠지면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처럼 잠기더니, 어느 순간 무릎까지 푹! 빠지는 것이었다. 나는 한발 한발 눈 위를 점프하듯이 다리를 높이 들어 걸어야 했다. 힘겹게 다리를 이이익~! 빼서 들었다 놓으면, 엄청난 눈의 중력이 푸우억~ 또 다리를 빨아들였다.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가 따로 있을까? 맑은 날엔 후딱 지나올 길을, 눈 속에 푸헉푸헉 빠지며 너무 많은 힘을 쏟으며 걸어서 천릿길 같았다.

간신히 눈길을 빠져나온 후엔, 너무 지쳐서 어디라도 드러눕고 싶었다. 그런데 앞서 걷던 영우가, 갑자기 눈이 깊게 쌓인 풀밭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나도 순간 사냥개처럼 힘을 내어 눈밭 위로 폭삭~! 몸을 던져 누웠다. 눈은 신기하게 차갑지 않았다. 잠바 등 너머로 느껴지는 눈은 어렴풋이 따뜻하기까지 하였다. 춥지도 않고, 얼굴이 더 따갑지도 않고, 구름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해서 여러 자세로 누워보았다.

두 팔을 날개처럼 부욱~ 펼쳐서 휘젓기도 하고, 배 위에 두 손을 올려놓기도 하고,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 눈 속에다 마구 비비며 아암~ 좋다~! 하고 외쳤다. 내가 누웠던 자리는 움직임과 옷 주름까지 생생하게 잡혀서, 거대한 파도 자국이 난 것 같았다. 일어나니 온몸이 눈사람처럼 무거웠다. 나는 개가 눈을 털듯이, 손도 반짝반짝 흔들고, 머리와 몸, 다리를 차례대로 부르부릅~ 털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 속에 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