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

2008. 2. 10. 22:50일기

<명필>
2008.02.09 토요일

친가에서 돌아와 설 연휴 마지막으로 외가에 들렀다. 우리가 가자마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는 막내 삼촌에게 받은 시계 이야기도 하고, 저녁으로 할머니가 직접 키운 채소를 뽑아 비빔밥도 해먹고, 식혜도 먹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방에 들어가 어떤 종이 꾸러미를 가지고 나오셨다. 그리고 나와 영우에게 그걸 나누어주셨다. 그것은 코팅지와 한지였다. 먼저 코팅지부터 읽어보았다.

거기에는 4학년이 되는 걸 축하한다는 말과, 격려하는 말, 그리고 미래에 내가 대학교 들어갈 때, 같이 손을 잡고 자랑스럽게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할아버지의 희망사항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조언이 있었다.

1. 이제 4학년 고학년이 되었으니, 실력과 지식을 1등에 연연하지 말고 무한대로 넓혀라.
2. 건강관리를 위해 살을 빼라.
3. 너의 꿈을 세계로 펼쳐라.

나는 할아버지께 "고맙습니다." 하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이번에는 한지를 펴 보았다. 한지에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사자성어와 속담이 한자로 쓰여 있었고, 밑에 한글로 뜻풀이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진정 놀라운 것은 붓으로 쓴 글씨가 매우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이 글씨가 정말 할아버지께서 쓰신 글씨란 말인가! 내가 입을 못 다문 채 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할머니께서 "이건 할아버지가 직접 쓰신 거란다!" 하시며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예전부터 할아버지께서 명필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이후로 오른손이 안 좋아지셔서, 글씨를 다시 잘 못 쓰게 되실 줄 알았는데, 글자 하나하나에 찬란한 빛이 나는 명필이셨다. 나는 글자를 코에 바짝 갖다대고, 생생한 먹 냄새를 맡아보았다.

"할아버지, 이제 손이 다 낳으셨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함빡 웃는 얼굴로 "오이 오이." 하시며 손짓으로 작은 글씨는 쓰는데, 큰 글씨는 쓰기가 아프다는 시늉을 하셨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붓글씨가 예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하셨다.

옛날에는 어떠셨는지 몰라도 지금 이 필체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환상적이어서, 푸르고 꼿꼿한 대나무 숲이 살아 숨 쉬는 듯한 느낌이 흘러 넘쳤다. 나는 기적을 일구어내신 할아버지에게 한없는 존경의 눈길을 보냈으며, 가족들은 둘러앉아 할아버지의 회복과 삶에 대한 의지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기뻐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관련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