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2008. 1. 3. 07:52일기

<편지>
2008.01.02 수요일

오랜만에 추위가 녹은 잔잔한 날씨였다. 피아노 학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우리 집 우편함에 쌓여 있는 수북한 우편물 더미 속에서, 내 앞으로 온 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크리스마스 때 내가 보냈던 편지에 대한 답장이, 어렸을 적 미술 학원 선생님에게서 온 것이다. 멋진 솔부엉이 우표도 함께 붙여져서!

선생님의 답장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신기하게도 미술학원 시절의 기억들까지 한장 한장 책을 펼치듯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 이야기가!

5살 때던가, 내가 처음 미술학원에 들어가 적응을 못 하고 낑낑대다가, 바지에 똥을 쌌을 때,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 번쩍 안아 들고 수돗물로 닦아주셨던 기억부터, 7살 졸업반 마지막 사진 찍을 때까지 나를 돌보아주셨던 기억들이, 한달음에 주르륵 나는 것이다.

내가 보라색 고양이를 그렸을 때, 와, 정말 잘 그렸다고 놀라시던 선생님 얼굴도 생각나지만, 밥을 잘 먹었다거나 친구에게 물건을 빌려주었다고 퍼붓듯 칭찬을 해주시던 기억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난다. 뭘 그런 걸 다 칭찬하셨을까? 나는 너무 느리고 엉뚱해서 무조건 칭찬을 많이 해주는 게 약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생님은 내게 오래된 친구처럼 편지를 쓰셨다. 이제 내가 11살이 되니, 마치 서로 머나먼 바다를 건너다가 각자 발견한 섬에서, 잠시 천막을 치고 휴식을 취하며 쓰는 편지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또 특이한 것은, 선생님의 편지 속에 끼어 선생님의 딸인 유빈이 누나도 내게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누나는 누나의 글을 평가해 달라고 썼지만, 내가 어떻게 평가하랴? 나보다 1년을 더 많이 산 누나의 글을. 쑥스럽다.

선생님의 편지는 새해의 첫 까치가 물어다 준 편지처럼, 그렇게 반가움과 희망으로 차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마지막 글귀가 오래도록 내 마음을 울리며 맴돌았다. '선생님은 솔직히 상우에게서 늘 배웠단다.' 그러나 늘 어리숙했던 나는, 선생님 없는 어린 시절을 상상할 수가 없을 만큼 배운 것이 많았고, 그 배움을 진정 사랑했다. 앞으로도 그럴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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