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들갑(5)
-
길을 잃은 아이
2014.11.19 수요일 춥다, 춥다, 으드드드~ 또 춥다. 입술이 얼어붙고 손가락은 시들어버린 시금치처럼 파랗다. 처음엔 팝콘 튀겨내는 기계처럼 몸을 떨며 걷다가 이제는 삐걱거리며 집을 찾아 헤맨다. 사람들이 나한테 시린 얼음물을 쉴새 없이 뿌리는 것처럼 춥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까지 통으로 얼어버린 듯, 알고 있는 단어는 오로지 '춥다'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난생처음 와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 앞으로 걷기만 했다. 왠지 집이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자꾸 걸어보지만, 걸을수록 허탕인 길을, 머리가 너무 얼어서 다시 새로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추위가 뼈 마디마디 스며들어 손가락은 까딱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유일하..
2014.11.24 -
양주에서 보낸 한여름
2011.07.19 화요일 "슬라이드 타자~!", "안 돼! 은철아, 죽을지도 몰라!" 나랑 은철이는 실랑이를 벌이며 애꿎은 경훈이 팔만 잡아당겼다. 은철이는 경훈이의 왼팔을 잡아당겼고, 나는 경훈이의 오른팔을 잡아당기고, 경훈이는 드디어 "우악~!" 소리를 질렀다. 여기는 1년에 한 번씩 '대장금 테마파크'에서 열리는 이동식 야외 수영장이다. 그렇다! 여기는 양주다! 오랜만에 양주를 찾아 초등학교 친구들과 수영장에 온 것이다. 오늘 아침 지하철을 타려고 일찍 집을 나섰을 때, 나는 심장이 크게 부풀어 올라 터지는 기분이었다. 어젯밤엔 옛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기대에 부풀어 잠도 못 잤다. 엄마가 걱정스런 눈으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면서 모레 방송 촬영이 있으니, 웬만하면 친구 집에서 자지 말고 늦게라..
2011.07.25 -
갑옷을 입은 손가락
2009.12.10 목요일 점심을 먹고 나서 아이들 대부분이 운동장으로 나가 놀았는데, 나는 기침이 나와서 교실로 올라왔다. 진석이와 경석이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교실 뒤편에서 진드기처럼 딱 붙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진석이는 경석이 등에 고동이 조개 잡는 모양으로 대롱대롱 달라붙었다가, 두 팔을 집게처럼 벌려 경석이 머리를 꽉 안고 격투기 하듯이 찍어눌렀다. 경석이는 으어어~ 하면서 진석이를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둘은 서로 쫓고 쫓기다 교실 문이 있는 사물함 옆까지 바짝 갔는데, 그만 다리가 엉켜 중심을 잃고 온몸을 기우뚱거렸다. 바로 그 옆을 지나가던 나는, 아이들이 넘어져서 머리라도 다칠까 봐 받치려고 오른손을 뻗었는데, 아이들 밀치는 힘에 밀려 갑자기 교실 문이 내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틈..
2009.12.11 -
얼어붙은 호수
2008.1.27 일요일 호수는 살얼음이 얼었고, 그 위로 흰 눈이 얇은 담요처럼 깔렸다. 호수 전체가 햇살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난다. 호수는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얼었는지,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드넓다. 언 호수 위에 놓인 나무다리가, 마치 한 세계와 또 한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처럼 보인다. 나는 무엇에 끌려가듯 성큼성큼 그 다리로 뛰어간다. 나는 나무다리를 삐걱삐걱 밟고 내려가, 다리 위에 털썩 주저앉아 언 호수를 내려다본다. 언 호수와 내 발끝은 닿을락 말락 가깝다. 멀리서 보았을 땐, 얼음이 얇아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돌처럼 단단해 보인다. 신기하게 호수 위 쌓인 눈에 발자국이 나있다. 그것도 온 호수를 가로질러 촘촘하게 눈도장을 찍은 것처럼! 누군가 언 호수 위에 이름을 남기려 죽음을 무..
2008.01.28 -
2006.07.15 폭우
2006.07.15 토요일 우리는 밤 11시쯤 홈플러스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비가 우리 차를 때리듯이 쏟아졌다. 그러더니 차 앞이 아주 안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는 빨리 와이퍼를 작동시켜 빗물을 쓰러 내렸다. 하지만 빗물은 투우사에게 소가 달려 오듯이 투두두툭 소리를 내며 계속 사냥꾼이 먹이를 사냥하듯이 덮쳐왔다. 그런데 차 바퀴가 빗물을 갈라서 양 옆으로 엄청난 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앞에 차는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차가 물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어떻게 사고라도 나는 건 아니야?" 하고 호들갑을 떨었고 엄마는 "상우야 그러면 아빠 운전 방해 되잖니? 좀 침착하렴." 하셨다. 영우는 비가 차를 무너질듯이 공격하고 있는데도 세상 모르게 잠이 쿨쿨 들었다. 그리고..
200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