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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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아이
2014.11.19 수요일 춥다, 춥다, 으드드드~ 또 춥다. 입술이 얼어붙고 손가락은 시들어버린 시금치처럼 파랗다. 처음엔 팝콘 튀겨내는 기계처럼 몸을 떨며 걷다가 이제는 삐걱거리며 집을 찾아 헤맨다. 사람들이 나한테 시린 얼음물을 쉴새 없이 뿌리는 것처럼 춥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까지 통으로 얼어버린 듯, 알고 있는 단어는 오로지 '춥다'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난생처음 와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 앞으로 걷기만 했다. 왠지 집이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자꾸 걸어보지만, 걸을수록 허탕인 길을, 머리가 너무 얼어서 다시 새로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추위가 뼈 마디마디 스며들어 손가락은 까딱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유일하..
2014.11.24 -
엉금엉금 거북이 마라톤
2011.05.14 토요일 '덜컹딜킥~ 덜컹딜킥~' 흔들리는 지하철에 맞추어서 내 몸도 조금씩 흔들렸다. 내가 오랜만에 지하철 4호선 열차를 타고 있는 이유는 오늘 있을 마라톤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 씩 1,2,3학년 모두가 함께 마라톤을 한다. 선수들처럼 42km의 장거리를 달리는 게 아니라 7km만 달리면 되지만, 난생처음 그렇게 작정하고 많이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되었다. 어두운 지하철에서 대공원역 2번 출구로 나와, 집합 장소인 분수대 앞까지 왔다. 분수대에는 아무도 없고, 분수대 조금 뒤에 '청운 중학교 거북이 마라톤'이라고 쓰여진 큰 현수막 아래에, 우리 학교 체육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는 조금 엉뚱한 상상이 들었다. 왜 하필 거북이 마라톤일까?..
2011.05.19 -
경복궁은 왜 이렇게 넓은 거지?
2010.10.22 금요일 오늘 우리 학교 6학년은,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와 경복궁에 견학을 오는 날이다. 친구들은 단체로 버스를 타고 오지만, 나는 도시락을 메고 걸어서 서대문 형무소에 도착했다. '학교를 멀리 다니니 이런 일도 생기는군!' 나는 여유롭게 약속 시간에 맞추어 산책하듯 길을 나섰는데, 오늘따라 이른 아침 햇살이 얄밉게 따가웠다. 사직동 터널을 지나니 시야가 트이고, 대번에 독립문 입구가 보였다. "아~ 맑다!"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형무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 반 아이들과 만나, 곧바로 서대문 형무소로 들어갔다. 서대문 형무소는 고문을 모형해 놓은 곳이 공사 중이라 빨리 나와서, 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경복궁으로 이동하였다. 뭐랄까? 언제나 걸어 다..
2010.10.25 -
어지러운 지하 세계
2008.12.25 목요일 저녁 6시, 엄마랑 나랑 영우는 명동 지하상가 입구에서, 엉덩이에 불을 붙여 튕겨나가듯 차에서 내렸다. 외할머니와 6시에 롯데 백화점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거의 다 와서 차가 꽉 막혀 옴싹달싹 못하길래, 내려서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 맞은 편에는 건물 벽 전체가 거대한 반짝이 전구로 뒤덮여, 물결처럼 빛을 내는 롯데 백화점이 서 있었다. 백화점 주변의 나무들에도 전구를 휘감아. 엄청난 반짝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백화점은 가까운 거리였지만, 도로를 꽉 메운 차들과,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이 없어서 잡힐 듯 말듯 멀어 보였다. 우리 뒤에도 역시 번쩍거리는 상가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앞으로 포장마차가 마치 이순신의 일자진처럼 모락모락 김을 뿜으며, 끝도 없이 늘어서 ..
2008.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