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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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동의 신발가게
2011.09.25 일요일 얼마 전, 나는 내 발과 1년 동안 함께 했던 운동화를 도둑맞았다. 처음에 살 때는 90% 정도 세일을 받아 아주 번드르르한 새것으로 샀었고, 감촉도 폭신하고 신이 났었다. 도둑맞기 며칠 전의 내 신발은 꼭 외로운 노인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밑창과 신발 몸을 이어주는 부분이 까지고 있었다. 흙먼지에서 뒹굴어서 그런지 주름 사이에는 누우런색 모래가 가득 끼어 있고, 뒷굽은 짓눌려져 있었다. 그런 신발이 없어지니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평소에 신발에 별로 신경을 안 썼던 것이 생각나, 신발을 새로 장만해야겠다는 굴뚝같은 마음이 들었다. 잊어버린 신발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우선 이 근처에 신발가게를 찾아보아야 했다. 그런데 서울로 이사하고 나서 집 근처에 대형 할인 마트가 없는 ..
2011.10.06 -
구사일생
2008.01.21 월요일 피아노 학원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께서 잘했다고 주신 젤리를 냠냠 먹으며 돌아올 때, 공원에 쌓인 눈이 나뭇가지로 새어들어 오는 햇살을 받으며 짠 녹고 있었다. 그러자 공원 길 전체가 이제 막 녹기 시작한 거대한 얼음 덩어리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고 무지 미끄러웠다. 나는 문득, 지금은 방학이라 한동안 가보지 않았지만, 학교 다닐 때 우석이랑 잘 다녔던 우리만의 지름길인 가파른 언덕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언덕은 풀이 많고 몹시 경사가 험해서, 한번 발을 내딛으면 중력의 작용 때문에 높은 곳에서 아래로 쉬지 않고 굴러 떨어지는 사과처럼, 단숨에 와다다다 멈추지 않고 아래로 뛰어내려 와, 우리 집과 우석이네로 갈라지는 길 위에 떨어지게 된다.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
2008.01.22 -
꼬마 우수 블로거
2007.12.28 금요일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내 친구 우석이가 놀러 왔나 하고 문을 열었는데, 어떤 젊은 형아가 작은 소포를 건네주었다. 주소가 쓰여있는 포장을 풀고 작은 박스를 열어보니, 티스토리 책도장이 들어 있었다. 모양은 네모난 크리스탈 장식품 같은데 밑바닥에 올록볼록하게 내 블로그 주소가 새겨져 있다. 이야! 바다 속에서 해적들이 건진 보물처럼 투명하구나! 그때, 엄마가 컴퓨터를 켜시며 나를 부르셨다. 2007년 티스토리 우수 블로거 선정 명단이 발표되었다. 우수 블로거로 선정된 100명의 이름을 따라 쭉 내려가 보니, 한참 지나 아래쪽에 내 블로그와 이름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내가 그렇게도 존경하는 썬도그님의 이름이 나란히 실려 있었다...
2007.12.29 -
2006.11.01 집현전 헌책방
2006.11.01 수요일 오늘은 집현전 헌책방이라는 아빠의 친구로부터 알게 된 레코드 가게에 갔다. 나는 레코드 가게라는 소리만 듣고 아주 삐까 뻔쩍한 가게인 줄 알았는데, 모양새가 아주 촌스럽고 옛날식 작고 평범한 집이었다. 그 안에는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는 옛날 책들이 있었다. 하지만 레코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레코드판은 책방 바깥에 플라스틱 박스에 차곡 차곡 쌓여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나란히 허리를 구부리고 굶은 사람들이 음식을 고르듯이 허겁지겁 레코드판을 고르는 동안 나와 영우는 요때다 하고 만화책을 잽싸게 골라 읽었다. 책방 안은 미로 같았다. 책장을 밀면 또 다른 책장이 나오고 또 밀면 또 나오고 '혹시 조선시대 집현전이 이렇지 않았을까?' 나는 갑자기 집현전 학자가 된..
2006.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