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12)
-
가출
2010.01.07 금요일 '끼이이익~!' 나는 쇳소리 나는 대문을 열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내 코와 입으로 빨려 들어왔다. 하늘은 바다보다도 더 새파랬고, 겨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햇빛이 쨍쨍했다. 아침부터 나는 답답했다. 방학 내내 추운 날씨가 이어져서, 꼼짝 않고 좁은 방 책상 앞에 앉아 책만 보았더니, 나의 몸은 에너지를 쓰지 못해 뻣뻣하고 근질거렸다. 엄마는 오늘따라 몸이 안 좋으신지, 표정도 안 좋고 잔소리만 하신다. 나는 엄마가 영우에게 잔소리하는 틈을 타서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런데 나는 도망치듯 나와서, 옷을 챙겨입고 나오질 못했다. 얇은 바지 한 벌에 내복을 안 입고 양말도 안 신고, 목폴라에다가 스웨터 하나를 달랑 걸치고 잠바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하늘색과 ..
2011.01.10 -
거짓말처럼 내린 우박
2010.11.08 월요일 오늘은 학교 수업이 끝나자, 친구들은 축구를 하는 대신에 카드 게임을 하러 우르르~ 어디론가 몰려갔다. 나는 카드가 하나도 없어서 혼자 오랜만에 일찍 집으로 향했다. 5단지 쪽의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 먼지 같은 구름이 깔렸다. 그리고는 곧 우릉쿠릉쾅~! 푸른 빛의 섬뜩한 천둥번개가 쳤다. 나는 '비가 오려나?' 생각하면서 아침에 혹시나 몰라, 실내화 주머니 안에 우산을 챙긴 일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작은 돌 같은 것이 톡! 떨어졌다. 이크! 꼭 작은 자갈돌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갑자기 그런 것들이 비가 쏟아지듯이 하늘에서 투두두두~ 떨어졌다! 나는 마구 뛰어 가장 가까운 편의점 천막 아래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2010.11.10 -
호수공원에서 만난 가을
2010.10.10 일요일 오늘은 일산에 있는 호수공원에 갔다. 나와 영우가 시험 준비 기간인데도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투닥투닥 다투니까, 엄마가 그 꼴을 못 보시겠다며 어디론가 가자고 하셨다. 엄마는 가을의 정취도 느끼고 야외에서 공부도 하자고 하셨다. 우리는 배가 고파 호수에 가까운 풀밭에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엄마가 싸온 맛있는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주먹밥, 김밥, 할머니가 시골 산소에 갔다가 따오신 토실토실 익은 밤, 할아버지께서 사오신 호두과자, 사과, 참외, 엄마는 이렇게 많은 것을 싸서 오셨다. 우리는 먹이에 굶주렸던 다람쥐처럼 배가 터지도록 먹고, 주섬주섬 각자 배낭에서 공부할 것을 꺼내었다. 하지만, 공부를 얼마 시작한 지도 안 됐는데, 어느새 나는 자동으로 움직이는 바지를 입..
2010.10.14 -
봄에 내리는 눈
2010.03.10 수요일 "후아~!" 도저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파트 현관 밖의 풍경은 말 그대로 하얀 나라였다. 지금까지 나는 '이제 겨울은 끝났어! 지긋지긋한 눈이여! 이제 다음 겨울까지는 안녕!'하고 생각하며 완전히 봄을 맞은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눈이 하룻밤 사이에 아무 데나 밟기만 해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내리니,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학교 갈 길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제대로 된 길이 있기는 하였다.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들어 논 발자국 길, 계곡 사이 흐르는 작은 계곡 같은 길은, 그나마 눈을 밟지 않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방이 엄청난 눈이 쌓인 상태에서, 그 사이 작은 길로 그것도 미끄러운 길로 다니는 것은, 공중 줄타기처..
2010.03.11 -
친구 집에서 옷 말리기
2010.02.22 월요일 "아, 이게 뭐야? 다 젖었잖아!", "아,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이런!" 석희와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307동 문앞, 계단에 앉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집에서 가져온 축구공으로 놀다가, 그만 서로서로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친 것이다. 장난을 친 뒤 우리는 온통 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장난치는 걸 바라보던 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골치 아프다는 듯이 눈을 감고 "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 동안 꽁꽁 얼었던 눈이 슬슬 녹아서, 단지 전체가 조금이라도 움푹 팬 곳에는 물로 가득 채워지고, 맨땅에도 물구덩이가 여러 곳이 생겼다. 그 속에서 우리는 철벅 철벅 공을 발로 차고 놀았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내 바지는 물에 젖어 무거워졌고, 양말도 축축해지고 신발 안에까..
2010.02.25 -
눈 속에 푹 빠진 날
2010.01.04 화요일 저녁 8시, 나는 영우와 함께 심부름을 하려고, 아파트 단지에 산처럼 쌓인 눈길을 헤치고 상가로 내려갔다. 매일 보던 길이지만, 폭설에 잠겨서 처음 보는 곳처럼 낯설었다. 우리는 새하얀 눈의 행성에 처음 도착한 우주인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저부적, 저부적~ 소금같이 수북하게 쌓인 눈 속을 걸어나갔다. 눈길은 가로등과 달빛에 비교도 안되게 하얀 운석처럼 빛났다. 눈이 적당히 쌓이면 환상적일 텐데, 도로를 포장한 듯 덮어버리니 어디를 밟아야 할지 분간이 안돼서 걸음이 위태위태했다. 그런데 마침 내가 맘 놓고 걸어보고 싶은 길이 눈에 띄었다. 그곳은 원래 차도와 인도 사이에 화단을 심어놓은 넓은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겨울이라 비어 있고, 눈이 아이스크림처럼 푸짐하게 쌓여 있었다. ..
2010.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