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브>와 계급사회

2015. 1. 7. 04:02독서

<차브>와 계급사회

2015.01.18 일요일


우리는 속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가 같지 않다는 것을, 대한민국 자본주의 사회 안에 분명히 계급이 존재하고, 그 계급을 나누는 것은 소득이라는 것을... 또한, 이런 계급적 구분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며, 상위계급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대다수 하위계급의 사람의 척추에 빨대를 꽂고 양분을 약탈하는, 매우 불합리한 구조라는 것을.


그러나 모른척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항상 강조하는 말들, '사람의 가치는 모두 같다.', 'we are the world', '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같은 말들은 계급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의 착취를 망각하게 하며, 하위계급의 사람들은 노력하면 누구나 상위계급에 진출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자꾸 되뇐다.


이 계급 체제의 유지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자신이 처한 환경이 열악하다고 믿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상위계급의 사람들은 항상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열려 있고, 자신들도 자신 계급이 누리는 부와 특권을 언제든지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 지금도 수많은 비정규직이 기업의 배를 불리는 일회용 스푼으로써 철저히 소모되고 버려진다. 애초에 자기들이 가진 것을 사회와 나눌 생각은 조금만큼도 없다.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이 지녀야 할 의무나 세금마저도 피해버린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극단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상위계급의 사람들이 자기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내려놓겠다니, 이보다 더한 거짓말도 없을 것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을... 개인의 노력은 물고 태어난 금수저에 짓이겨지는 꼴이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정말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반 안에서 부모님의 경제 수준에 따라,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아이들의 삶이, 그들이 살면서 느낄 감정이, 그들의 삶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결코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아빠가 직장을 잃고 돈을 잃어 외할머니 집에 얹혀살게 됐을 때, 항상 따뜻한 가족일 것 같았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 가족을 떠안고 나서부터는, 나를 볼 때 항상 무한한 사랑의 눈길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힘겹게 만든 카페가 건물주의 재건축 통보, 날아들어 온 철거 계고장 앞에, 흑자는커녕 투자한 돈마저 먼지 더미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알고 싶지 않아도 뼈가 시리도록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소득은 곧 그 사람의 계급이라는 걸! 그렇게 갈린 계급 간의 사회적 위치가 결국엔 한 사람 삶의 가치를 저울질하게 한다는 것을.


인간의 삶의 가치는 평등하고 모든 사람은 소중하고 귀하다는 건, 그저 꿈같은 얘기이며 낮은 경제수준,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또는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사회에서 이탈하지 않고 살게 하려고 하는 허울 좋은 말뿐이라는 것, 돈이 제일의 가치이며 모든 것 위에 있다는 것을! 의료, 복지, 교육 등 경제적 계급에서 벗어나 평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그 누구도 자신의 경제적 계급을 정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좋든 싫든 우리나라에서 태어난다면 계급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막 중2가 되던 시점에서, 내가 혹독하게 느낀 것은 그거였다.


하지만 모른 척 했다. 아니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 학교, 내가 사는 모든 곳에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계급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공한 사람도 많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한 나라도 수두룩하다.' 이런 말들은 넘치도록 들을 수가 있었다. 우리 집이 가난하고 늙으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댁에 얹혀사는 것은, 우리 아빠가 직업을 잃은 것은, 우리 집이 가난한 것은, 우리 사회가 더럽게 썩은 구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없었다. 나는 그저 주변에서 지겹게 들어 주입된 말들로 최면을 걸어 위안하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남은 전 재산을 들인 카페가 넘어가는 것을 보며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는 밥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것을, 엄마가 매일 밤 우는 것을 보고 그저 우리 가족이 못나서, 노력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을 애써 믿으려고 했다. 모두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닌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우리 아빠는 패배자가 아닌데, 항상 우리 가족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했는데, 이렇게 된 게 정말 다 우리 잘못일까? 하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사회가 심어놓은 보편적인 통념의 틀이 나를 천근만근 짓눌러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았던 것 같다. 정말 한 글자의 분량도 추억하기 싫은 그 시간은 이제 모두 지나갔다.


그런데 요즘, 박근혜 정부 3년에 접어든 지금, 공장 굴뚝 위에 올라간 노동자들을 보면서,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자꾸만 세금이 오르는 지금, 그때 목소리를 내지 못한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시험과 크리스마스, 연말로 한창 바쁜척 하고 있던 12월의 끝자락 즈음, 나의 책을 만들어주신 고마운 출판사 <북인더갭>에서 한 권의 책이 왔다. <차브>라는 불친절한 제목을 달고 나에게 온 책은, 그야말로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그동안 어떤 책이나 교과서도 나에게 들려주지 않았던 조작된 계급사회의 현실을 낱낱이 대면하게 해주었다. <차브>는 제2의 조지 오웰이라는 평을 받는 영국의 오언 존스가 쓴 화제작으로 안병률 대표님이 직접 번역을 하셨다.


한때는 영국의 소금이라 불리던 노동계급이, 정부의 부자들만을 위하는 정책에 따라, 일자리를 잃고 하층계급으로 전락하게 되며 오늘날 <차브>라는 비하된 이름으로 불리며 쓰레기 취급을 받는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차브>를 읽으며 영국이 선진국 중에서 양극화가 가장 심한 나라이고, 노조 탄압, 언론과 정치인들의 태도도 우리나라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고, 내가 중학교 때 했던 생각들은 병신같은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회가 주입한 통념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을 스스로 깎아내렸으며, 내가 낮은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열등감마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에 대한 해방감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중학교 시절 지독하게 겪었던 패배감과 열등감, 억울함으로 아직 짓눌려 있던 나를 끄집어내 주었고,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모든 의문, 피하려고 했었던 진실을 나에게, 아니 이 세상에 까발린 느낌이라 통쾌하다. 최상위 계급을 위해 다수의 하위계급 사람들이 피를 빨리는 이 불합리한 구조에 대해서, 기업과 정권이 죄 없는 사람들의 척수를 뽑아 마시는 우리 사회를,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하위계급이 된 것 마냥 씨부렁거리는 꼰대들을 맹렬하게 물어뜯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역시 안병률 아저씨의 안목과 능력은 대단하다. <차브>는 영국 계급사회의 문제점을 알리고 해결하고자 쓴 책인데, 바다와 대륙을 건너온 대한민국에서 나를 깨닫게 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점도 진단하고 있다. 혹,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 이 책은 당신을 거북하게 할지도 모르지만 정말 진실이 알고 싶다면, 또 잘못된 현실에 저항하려면, <매트릭스>에서 빨간약을 선택해 현실로 나간 네오처럼 이 책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