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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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아이
2014.11.19 수요일 춥다, 춥다, 으드드드~ 또 춥다. 입술이 얼어붙고 손가락은 시들어버린 시금치처럼 파랗다. 처음엔 팝콘 튀겨내는 기계처럼 몸을 떨며 걷다가 이제는 삐걱거리며 집을 찾아 헤맨다. 사람들이 나한테 시린 얼음물을 쉴새 없이 뿌리는 것처럼 춥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까지 통으로 얼어버린 듯, 알고 있는 단어는 오로지 '춥다'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난생처음 와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 앞으로 걷기만 했다. 왠지 집이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자꾸 걸어보지만, 걸을수록 허탕인 길을, 머리가 너무 얼어서 다시 새로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추위가 뼈 마디마디 스며들어 손가락은 까딱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유일하..
2014.11.24 -
12년을 걸어온 그대에게
2014.11.12 수요일 투두두둑~ 닫지 않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와 빗소리에 잠을 깬다. 가을이 언제 왔다 갔는지도 모르게 이젠 겨울인가 보다. 새벽 5시 50분, 아직 아침이라기에는 어스름이 전혀 가시지 않았다. 밤새 비가 와서 그런지 추위와 구름의 그림자가 창밖을 가득 메우고 있다. 나는 이 시간이 좋다. 이 세상에 나만이 깨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시간, 의식을 가지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 어쩌다 한 번씩 새벽의 냄새를 흠뻑 맡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참 좋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수능을 이틀 남긴 오늘이기도 하고, 나와 수능 사이가 이제 얼마 남지 않게 느껴지는 오늘은, 흘려보냈던 많은 나날처럼 거리낌 없이 여유를 즐기기가 어렵다.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나 ..
2014.11.12 -
세월호 침몰에서 멈춘 시간들
2014.10.09 목요일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고등학교 1학년, 내 삶 살기에도 숨이 턱까지 차는 와중에, 주변 돌아가는 게 무슨 상관이냐, 성질 폭발하면 행여 다른 사람에게 모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다들 그냥 그러려니 넘기는데 나만 과민반응한다는 취급 받을까 봐, 애써 못 본 척 넘긴 날들이, 걷잡을 수 없는 추악한 소용돌이가 되어 나라를 휘감고 있다. 잔혹한 서북 청년단의 부활, 휴일 근로자의 휴일 추가노동 수당을 없애는 근로기준법 재정 안, 상가세입자의 권리금에 붙이게 되는 새로운 세금, 개인의 인터넷 이용까지 감시하는 검찰, 그리고 아직 사고의 원인도 규명되지 않은 채 잊혀가는 세월호 참사까지... 어지럽고 불안하다. 아무리 봐도 정상답지 않은 상황들이 대기한 것처럼 줄줄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2014.10.11 -
8월의 왕푸징 거리
2014.08.09 토요일 '중국'하면 떠오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네 발 달린 것은 의자 빼고는 다 먹는다!'라는, 어릴 적 들어왔던 중국인의 폭넓은 식습관이다. 북경 여행을 온 내내, 나는 밥 먹으러 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했다. '메뚜기 볶음? 말벌 조림? 풍뎅이 튀김? 생바퀴벌레?' 같은 끔찍한 상상을 하며 밥을 기다렸다. 다행스럽게 모두 평범한 식당에 걸맞은, 평범함이라는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는 소박한 밥과 기름진 반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이 왕푸징 시장 골목에서는 '평범함'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아주 특이한 음식들이 많았다. 입구에서부터 짭조름하고 찌릿찌릿한 향신료 냄새가 진동하며, 꼭 콩나물 지하철에서 시장판이 열..
2014.08.13 -
북경여행을 앞두고
2014.08.06 수요일 '여행'이란 두 글자는 얼마나 오랜만에 써보는 단어인가? 언젠가부터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나의 내향성과 어디 놀러 가기에는 부담이 되는 우리 집의 경제적인 상황 때문에, 몇 년간 여행이란 단어를 써 볼 기회가 없었다. 지난 7월 말, 친할아버지, 할머니 생신 때 대구에 내려갔다가, 생신 축하하는 자리에서 할아버지는 당장 전화로 중국행 비행기를 예약하셨다. 할아버지께서 우리 가족 네 명과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총 여섯 가족의 북경여행을 예약 상담하는 동안 나는 그 옆에서 기분이 얼떨떨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시는 데다 그 고민과 애증을 항상 격한 말투로 풀어내셔서 듣고 있자면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2014.08.06 -
교회에서 상우일기를 만나다!
2014.07.15 화요일 오늘은 지난 12일, 토요일 오후 4시에 열렸던 일산은혜교회 북 콘서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일산은혜교회는 출판사, 북인더갭 대표님의 가족이 다니는 교회였고, 지난봄 일산으로 이사 와 엄마가 은혜교회에서 열리는 '어머니 학교'에 6주간 다녔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 사회 교회의 대부분을 싫어한다. 내가 갓난아기였을 때 유아 세례를 받고 세례명까지 받았던 카톨릭 신자인데도, 커오면서 내가 느꼈던 교회의 배타적 태도, 강압성, 인간은 빼놓고 물질 숭배 사상만 자리잡은 듯한 분위기에 꽉 혐오감이 잡혀서이다.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예를 들면 용산참사 때 촛불을 든 그리스도인들 빼놓고 교회가 뭐 한 거 있었나? 여하튼 나는 교회에 대한 편견이 강하다. 하지만..
2014.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