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숲(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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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과 두루미
2013.09.18 수요일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으니까 몸이 뻐근했는데 보름달이 무지 밝았다. 나는 밤 10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엄마와 영우와 함께 산책을 다녀 오겠습니다!" 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바깥은 어둡고 캄캄했지만, 조용하게 걷기에는 시원하고 포근한 공기였다. 여기는 대구 달성군 화원읍 아파트 단지, 친할아버지께서 살고 계신 곳이다. 아파트 단지 후문 밖을 벗어나자 개천이 가운데 흐르는 산책로 겸, 놀이터가 바로 보인다. 나무 계단을 밟고 내려가 놀이터로 접어드니, 사박사박한 모래길에 걸음이 홀린 듯 척척 걸어진다. 개울가를 따라 잔잔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앞장 서 힘 있게 걸었다. 보폭을 넓혔다가 줄였다가, 한쪽 발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뜀박질을 뛰었다가 주저앉았다 하며, ..
2013.09.21 -
여름 밤 산책
2010.07.16 금요일 밤 9시, 엄마, 아빠는 갑자기 나갈 준비를 하시며 "엄마, 아빠 산책간다!" 말씀하셨다. 나와 영우도 얼떨결에 축구공을 가지고 따라나섰는데, 아빠는 신경이 쓰여서 산책을 못하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축구공을 놀이터 옆 풀숲에 묻어두고 본격적으로 밤 산책을 시작하였다. 낮에는 느낄 수 없었던 풀의 향기가 밤의 어둠과 고요에 떠밀려왔다. 밤 공기는 살짝 으스스 추웠다. 나는 소매가 없는 옷을 입어서 더 춥게 느껴졌다. 나는 달렸다. 빠르지는 않지만, 천천히 '흠하~ 흐음 하아~' 숨을 쉬면서 규칙적으로 팔을 저으며 달리니, 속도는 느려도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한참 달리고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미 아파트 단지는 멀어져 있었고, 가족들은 한참 뒤에 따..
2010.07.17 -
화석 소동
2009.01.03 토요일 엄마가 바쁘셔서 집에 안 계셨다. 나는 배가 고파서 영우랑 밥 타령을 하였다. 그래서 아빠는 우리를 데리고 집에서 좀 떨어진 시골길에 있는 식당으로 가셨다. 그 식당은 오늘 다른 건 안 되고 설렁탕만 된다고 했다. 영우랑 나는 설렁탕을 훌떡 먹고 식당 밖으로 나와 뛰어놀았다. 영우는 주차장 마당 한가운데서 춤을 추며 놀았고, 나는 마당 가장자리에 있는 마른 풀숲 속을 파헤치며 놀았다. "영우야, 이리와 봐!" 영우는 춤을 추다가 "왜?" 하며 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바로 전에 풀숲 돌무더기 사이에서 발견한, 네모난 바닥에 브이(v)자 모양의 무늬가 찍혀있는 거칠거칠한 회색빛 돌을 영우 눈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영우는 얼굴을 돌에서 뒤로 떼고, 양손을 모아 돌을 잡고, "..
2009.01.05 -
달팽이와 수업하는 아이들
2008.05.29 목요일 3교시 체육 시간이 끝나고 중앙 화단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는데, 화단 풀숲 여기저기에서 달팽이가 보였다. 실내화를 갈아신던 아이들은 달팽이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올리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하였다. 달팽이를 자세히 보니, 조그만 게 귀엽기도 하고, 툭 튀어나온 까만 눈에 뭔가 닿으면, 눈을 살 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다시 쑥 나오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제각기 달팽이를 몰래몰래 교실로 가져갔다. 수업 시간 내내 아이들은 달팽이를 나름대로 보관하며 수업을 들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하여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떤 아이는 언제 준비했는지, 커다란 병뚜껑에 휴지를 깔고, 물을 적셔 그 위에 풀잎을 몇 장 얹어, 달팽이를 올려놓았다. 또 어떤 아이는 책상 위에..
2008.06.02 -
2007.04.05 거리의 예술가
2007.04.05 목요일 학교에서 집으로 오고 가는 길은 이상하게도 나에게 작지만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해준다. 나는 그것들이 즐겁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초록색 공원 트랙 길을 따라 내려오던 중, 맨발 마당 맞은 편 풀숲 속에서 아름다운 관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너무 부드럽고 편안해서 나도 모르게 그 음을 따라 부르며 풀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기 벚꽃 나무 아래 벤취는 어릴 때 엄마와 내가 앉아 책도 읽고 이야기도 나누었던 곳인데, 그 벤취에 어떤 아저씨 둘이서 클라리넷을 불고 있었다. 아저씨들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무언가에 집중해서 연주를 할 때, 벚꽃 나무는 마치 무대 배경처럼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바람도 잔잔하게 불고 음악 소리가 너무 포근하여 엄마 생각이 났다..
2007.04.05 -
2007.03.19 가슴 아픈 사실
2007.03.19 월요일 학교에서 영어 특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학기 초에 공원 안 풀숲가에서 이름 모를 어린 나무를 발견했었는데 그 당시 그 나무는 키가 나와 맞먹었고, 잎사귀는 연두색이었고 껍질은 보들보들해서 아기 나무라 여겼다. 그런데 그 어린 나무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밑동만 남기고 싹둑 베어져 있었고, 베어진 나무 몸뚱이들이 시체처럼 풀숲에 널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여기 이 아기 나무만큼은 내가 지켜 주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 후로 매일 학교 오고 가는 길에 어린 나무를 만져주고 이야기도 걸고 이름도 무엇으로 지어줄까 고민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오늘 알게 되었다. 그 나무는 이제 막 자라는 나무가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 윗 부분에 있는 굵은 가지들에 여..
2007.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