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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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돌아오면
2009.07.14 화요일 나는 요즘 태양이 없는 나라에 사는 기분이다. 집에서 조금만 나가면 보이는 옥수수밭이, 비를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고, 꿋꿋해 보이던 나무들도 옆으로 힘없이 쓰러져있고, 비바람에 꺾인 나뭇가지가 전깃줄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요즘엔 학교에서 돌아오면, 흠뻑 젖은 책가방에서 젖은 책들을 꺼내 마룻바닥에 쭉 늘어놓고 말리는 게, 급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겨우 마른 책을 가방에 넣고, 다시 콜록콜록거리며 비를 맞고 학교로 간다. 우산은 더 비를 막아주지 못해 쓸모가 없어졌고, 지난주 비폭탄을 맞은 뒤로 걸린 심한 감기가, 계속 비를 맞으니까 거머리처럼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우리는 온종일 내리는 쇠창살 같은 장맛비에 갇혀, 이 불쾌감과 ..
2009.07.15 -
개미들이 떠내려가는 골짜기
2009.06.20 토요일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하교길, 간신히 붙잡고 오던 낡은 우산 살이 휘어지면서, 우산도 확 뒤집혔다. 내 몸은 더 젖을 것이 없을 만큼 스펀지 상태였다. 이제 물에 잠긴 놀이터 맞은 편 인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면, 오르막이 보이고, 이 오르막만 넘으면 집 앞에 도착할 것이다. 이 오르막길에서는, 위쪽에서부터 흙길에 고인 듯한 빗물이 아래로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폭이 좁게 흐르는 물줄기가, 마치 암벽들 사이로 흐르는 물길처럼 거침없었다. 그래, 그것은 세차게 물이 흐르는 깊고 긴 산골짜기와도 닮았다. 그런데 무언가 까만 점 같은 것들이 물길에 섞여 동동거렸다. 몸을 수그려 자세히 보니, 그 물길과 물길 주위로, 미처 비를 피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개미들이 허둥대..
2009.06.21 -
한겨울 밤에 물냉면
2007.12.27 목요일 저녁 8시, 방학을 맞이하여 아빠가 마침 배도 출출한데, 특별히 냉면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잠바를 입고 신났다고, 집 앞으로 나갔다. 엄마는 추운데 무슨 냉면이냐고 툴툴거리셨다. 영우도 냉면은 싫고 햄버거는 안 되겠느냐고 졸랐다. 아빠는 힘을 주어 "보통 냉면이 아니야. 특별 세일하는 오장동 함흥냉면이라구!" 하셨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으리으리한 고깃집 앞이었다. 영우는 "와! 갈비집이다!" 하며 좋아라고 펄쩍 뛰었다. 엄마는 "어디가 세일이야?" 하며 기웃기웃하셨다. 그때 아빠가 "봐! 저기, 냉면 세일!" 하며 입구에 붙어 있는 행사 세일 메뉴를 손가락으로 찾아내셨다. 고깃집 문을 열자마자 지글지글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도 바글바글 불판 앞에 둘러앉..
2007.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