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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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보다 커버린 나
2010.06.08 화요일 학교 갔다 와서 샤워한 뒤, 옷을 입고 드라이를 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엄마가 키를 재보자고 내 옆에 서보셨다. 화장대 거울에, 나와 내 옆에선 엄마의 모습이 나란히 비추어졌다.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나와 엄마의 키가 비슷비슷했었다. 때로는 엄마가 키높이 신발을 신으셔서 잘 느끼지 못했는데, 거울로 보니 어느새 내 키가 엄마보다 훌쩍 더 커 있었다. 5학년 때만 해도 엄마보다 작았던 나는, 이런 날이 올 줄 상상하지 못하였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네 살인가, 다섯 살인가? 할인마트에서 엄마를 잃어버려, 미아보호소에서 방송을 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 엄마가 달려오셨다. 그때 고개 숙여 나를 안아주던 엄마는 정말로 커 보였다. 그래서 언제나 엄마..
2010.06.09 -
쉬는 시간의 풍경
2009.12.01 화요일 2교시에 있을 한자 인증 시험을 앞두고, 우리 반은 여느 때와 같이 쉬는 시간을 맞았다. 기말고사가 끝나서 긴장이 풀렸는지 한자 공부하는 아이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면 나만 빼고 모두 시험 준비를 마쳐서 자신에 넘쳐 있거나! 나는 문제지에 나온 한자 위에 손가락을 대어 덧써보다가, 아이들이 너무 자유롭고 신나게 노는 걸 보고, 나만 이러고 있는 게 잘못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의자를 앞으로 밀어 넣고 교실 뒤로 걸어나간다. 원래 미술실이었던 우리 교실 뒷부분은 다른 반 교실보다 엄청 넓다. 그중 제일 오른쪽 구석 바닥에 처박히듯 털썩 주저앉는다. 나는 옷 뒤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벽에 기댄 자세로 느긋하게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2009.12.02 -
어린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9.02.28 토요일 드디어 피아노 학원 연주회 날이 열렸다. 점심을 먹고 학원에 모여 모두 버스를 타고 양주 문화 예술 회관으로 갔다. 햇볕은 따습고 바람은 쌀쌀했다. 공연장에 들어가니 내가 가장 고민하던 문제가 닥쳐왔다. 바로 연주할 때 입을 연미복을 갈아입는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나는 '연주회 때 입을 옷에, 내 몸에 맞는 사이즈가 있을까?' 궁금했다. 지난해 피아노 학원 연주회에서는 겨우 맞는 옷을 찾기는 하였지만, 연주회 내내 너무 꽉 껴 숨이 막혔었는데... 남자 아이들은 공연장 복도에서 디자이너 아줌마가 옷을 나눠주셨다. 까만 바지는 그런대로 잘 맞고 시원하고 느낌도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윗옷을 벗으려는데, 그때 여자 아이들이 우르르 무엇을 물어보려고 몰려와, 나는 남자 화장실로 가서..
2009.03.03 -
정글 소년 이발하기
2008.01.08 화요일 아빠와 나는 오랜만에 남성 전용 미용실 의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갔다. 주인 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빠가 "저는 됐고요, 애를 좀 잘라주려고요. 머리를 길르려고 하는데, 너무 길어서 눈을 찌르네요. 앞머리하고 옆머리를 다듬었으면 좋겠네요." 하고 자세히 부탁하셨다. 나는 이발하면서 예전처럼 간지러움을 못 참고 웃음보를 터뜨리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무심코 가운데 의자에 앉았다. 미용사 아주머니께서 "아냐, 세 번째 자리에 앉아라." 하시면서 내 목에 넓은 보자기를 두르고 가위와 빗을 가져 왔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가위 모양으로 만들어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집어들고 가위로 한 번에 샥 잘라내었다. 창꼬치가 사냥을 할 때 한 번에 작은 물고기를 빨리 삼켜버리는 것처럼. 나..
2008.01.09 -
2007.10.22 빛을 쏘는 아이들
2007.10.22 월요일 4교시 체육 시간에 과학 시간 때 못했던 실험을 하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우리는 먼저 손거울을 가져온 사람과 안 가져온 사람으로 나누어, 3m 정도 거리를 두고 나란히 마주 섰다. 그런 다음 손거울을 가져온 사람이 거울을 자기 쪽으로 향하지 않게 반대 편으로 거울을 돌려 비추었다. 나는 낙건이 가슴을 향해 거울을 비추었다. 그랬더니 거울에서 광선이 나가듯이 노란 빛이 낙건이 가슴을 맞추었다. 낙건이는 그 빛을 지우려는 듯이 두 손으로 가슴을 박박 문질렀다. 어떤 애는 빛을 더 맞으려고 두 손을 펼치고 빛을 향해 뛰어다녔고, 또 어떤 애는 빛을 피하려고 요리조리 뛰어다녔다. 빛을 쏘는 아이들은 사냥꾼처럼 한 명이라도 더 맞추려고 안달이 나서, 그야말로 레이저 쇼처럼 정신없는 수..
2007.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