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아이

2014. 11. 24. 20:05일기

<길을 잃은 아이>

2014.11.19 수요일


춥다, 춥다, 으드드드~ 또 춥다. 입술이 얼어붙고 손가락은 시들어버린 시금치처럼 파랗다. 처음엔 팝콘 튀겨내는 기계처럼 몸을 떨며 걷다가 이제는 삐걱거리며 집을 찾아 헤맨다.


사람들이 나한테 시린 얼음물을 쉴새 없이 뿌리는 것처럼 춥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까지 통으로 얼어버린 듯, 알고 있는 단어는 오로지 '춥다'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난생처음 와보는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을 찾아가야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 앞으로 걷기만 했다. 왠지 집이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자꾸 걸어보지만, 걸을수록 허탕인 길을, 머리가 너무 얼어서 다시 새로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추위가 뼈 마디마디 스며들어 손가락은 까딱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소리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라는 고함뿐! 거의 몸이 폐지 줍는 할머니처럼 구부려질 찰나, 정말 더 걸을 수가 없어서 근처 상가 입구 문턱에 걸터앉아, 보온기능을 전혀 못하는 가벼운 잠바 깃을 머리끝까지 올려 감쌌다. 폐 속에서 나온 따뜻한 숨이, 입 밖으로 나와 옷에 부딪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아주 조금씩 생각이 돌아왔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춥다'라는 안개가 조금 걷히고 나자, 길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나는 당장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도대체 여기가 어디쯤일까? 가늠해본다. 불과 2시간 전 오후 5시엔, 조별과제를 하기 위해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한정거장 거리에 있는, 처음 보는 동네에 내렸었지. 반 아이들과 모여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공원에서 영어 동영상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었다.


'겨우 마을버스 한 정거장 거리인데 돌아올 때는 산책도 할 겸, 걸어서 와야지!'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길을 전혀 모르면서 마을버스 한정거장 거리라고 쉽게 보고, 돌아올 때의 버스비도 가져오지 않은, 2시간 전의 나도 미웠다. 그 한정거장 거리가 직선으로 난 길이 아니었고, 대로변을 돌아 엄청 넓은 굴다리를 지나쳐 거대한 아파트 숲 단지에 섰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조금만 걸으면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익숙한 장소가 나올 줄 알았는데, 가도 가도 아파트 사거리의 낯선 길이 끝없이 이어질 뿐, 표지판도 없다.


핸드폰의 배터리도 떨어져 버린 최악의 상황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 안내방송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미아가 돼버렸으니 어쩐다? 이상하게도 별로 걱정이 안 됐다. 17년 살면서 얻은 경험으로 어떻게든 해결된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알기 때문일까? 불쑥 어릴 때의 기억들이 올라왔다. 대형 할인마트에서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다 엄마, 아빠를 놓쳐버렸을 때는 바지까지 오줌을 지리며 촉촉하게 울었고, 비교적 컸던 6학년 때도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잠이 들어, 역을 지나치는 바람에 엄마와 전화를 하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작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아파트 단지 허허벌판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는데, 그다지 현실감이 없다. 감정변화에 따른 긴장감도 없고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호들갑도 없다. 이미 결말을 아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감흥이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처한 현실인데... 요즘 내가 사는 매 순간이 지금처럼 권태로웠던 것 같다. 아니, 권태롭기보다는 만성이 된 절망, 짧은 삶에서의 분노가 너무 많이 쌓여 더 새로운 것을 못 느끼는 건 아닐까? 언젠가는 내가 '내 짧은 삶'이라는 단어를 못 붙일 정도로 나이가 들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며 마음 놓고 살만한 세상이 올까? 제도는 변화할까? 돈보다 생명이 대접받는 세상이 올까? 그때까지 살 수 있을까? 추위로부터 조금 정신이 드니, 잡생각이 머리를 대신 채운다. 


나는 꿈에 나오는 슬픈 길을 걷듯 계속 걸었는데, 아직도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시간은 점점 더 지나고, 이제는 잡생각도 하기 어렵게 다시 겁나는 추위가 파고든다. 배가 고파서 내장의 어디가 풀려버린 것 같고, 김빠진 타이어처럼 몸은 지쳐가고, 다가올 한겨울 칼바람을 한번에 다 마셔버린 듯한 어지러운 머리까지... 나는 곧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사실 뭐라고 말하였는지는 너무 추워서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머니께서 나를 가엾게 여기는 표정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반대방향으로 온 것 같다고, 여기는 너무 머니깐 버스를 타고 가라고 정류장 위치를 알려주시고 버스비 천 원까지 주셨다. 전화번호를 주시면 꼭 갚겠다고 말했는데 아주머니는 한사코 거절하며 바쁜 걸음을 옮기셨다. 그렇게 집에 와서도 아직 그게 있었던 일인지 모르겠다.


출처-http://www.nemopan.com/photo_education/2268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