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구 물세례를 맞은 날

2011. 5. 24. 11:48일기

<하수구 물세례를 맞은 날>
2011.05.20 금요일

지금 내 몸에서는 하수구의 폐수 냄새가 나고, 온몸이 찝찝하도록 꼬질꼬질 더러운 똥물이 묻어 있다. 게다가 하늘에서는 "투 툭, 투 톡~!" 비까지 내리지만, 신기하게도 전혀 비참한 기분이 안 든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필립이와 지홍이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롯가에 하수구 공사를 했는지, 하수구 뚜껑이 열려 있었다. 하수구 안에서 나온 걸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물질과 비가 뒤섞여, 인도와 차도 사이에 신기한 물감 같은 액체가 엄청 고여 있었고 비릿한 냄새가 났다.

나와 친구들은 호기심이 들어 하수구 앞에 가까이 가 보았다. 구멍이 뚫린 하수구는 안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구더기 같은 벌레들이 꾸물꾸물 거리고 있었다. 필립이는 "상우야! 이거 되게 불쾌하다! 빨리 가자!" 하였고, 나는 "응, 여기 있어서 뭐 좋을 게 있겠어..."  하고 말할 때였다. 어두운 날씨 때문인지 헤드라이트를 번쩍거리며 달려오는 중형차 한 대가, 바로 우리 앞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나쳤다.

덕분에 하수구에서 흘러나온 물과 빗물이 한데 섞인 물이, 꼭 거대한 파도가 치듯이, 나와 필립이, 지홍이,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 서 있던 나를 덮쳤다. 눈가를 덮은 물에 잠깐 눈을 뜰 수 없었고, 몇 초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서로의 꼴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필립이는 바다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머리가 축축하게 떡지고, 얼굴에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지홍이는 오줌이라도 싼 것처럼 바지와 상의에 물이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제일 심한 것은 나였다. 필립이와 지홍이는 교복 정장을 입지 않았지만, 나는 교복 정장을 다 입고 있었던 것이다. 물에 빠진 기니피그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우리 셋 다 몸에서 하수구 썩는 물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하긴, 여기는 학교 앞이라 빨리 달리는 차도 별로 없고, 딱 하수구가 열려 있어서 물이 새어나와 있을 때 비가 오고, 우리가 그 앞을 지나가고 이런 우연들이 겹쳐서, 평소에는 경험하기 쉽지 않은 일을 만들어 냈구나! 그냥 빗물이라면 몰라도, 하수구 썩은 물이 섞인 빗물을 맞는 경우는 거의 드물지 않을까?

그런데 이상하게 비참하지 않았다. 친구와 걷다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것도 흔히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우리는 한동안 걱정에 빠졌다. '집에 이 꼴로 가면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실까?', '교복 정장은 또 당장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하나?', '사람들이 우리한테서 나는 냄새를 불쾌해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는 불안하였지만, 옆에 있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언젠가 그 차 주인을 만나서 모두 변상을 받고 말겠어!"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비는 그치지 않고 부슬부슬 내렸고 교복은 더 젖었지만, 어차피 더 젖을 자리도 없이 흥건히 젖었고, 비라도 맞으면 조금이라도 이 불쾌한 냄새가 사그라질 것 같아서 그냥 그대로 걸었다. 입을 아! 벌려서 빗물을 입안에 모으기도 했다. 집에 가서 야단맞는 게 걱정이지만, 나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이런 일을 당하니 그렇게 슬프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다. 그래서 이 순간만큼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경험이라 생각하며 애써 웃으며 길을 걸었다.

하수구 물세례를 맞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