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의 마지막 경기

2014. 2. 23. 23:22일기

<김연아의 마지막 경기>


2014.02.21 금요일


지금으로부터 4년 전 2010년 겨울의 끝, 아직 2010이라는 숫자가 어색한 새해같은 기분이 남아 있을 무렵이었다. 우리 가족이 할인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려 하는데, TV판매 하는 곳에서 수십개의 TV가 온통 한 방송을 틀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그앞에 멈춰서서 미동도 없이 화면에 눈을 고정시켰다.


가끔 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들이 어떤 상태를 가르키는건지 직접 체험 할 때가 있는데, '숨죽인다'라는 표현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벤쿠버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경기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출전한 우리나라 여자 선수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숨죽이고! 있었다. 나와 우리가족도 그틈에 그림자처럼 끼어서!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피겨에 대한 상식이 없다. 어떤게 잘 뛰는 점프인지, 누가 더 잘 하는건지 감도 안 오지만, 그때 우리나라 선수의 연기가 정말 매끄러웠고, 거짓말 같았던 기억이 난다. 얼음 위에서 붕~ 날아오르고 돌고 스케이팅 하는 모든 동작이 오선지 위에 음표처럼 보였다. 어떻게 그런 연기를 펼치는지, 그런 마법같은 연기를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참 꿈같은 순간이었다. 김연아! 우리나라에 저렇게 피겨스케이팅을 잘 하는 선수가 있었구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김연아라는 이름이 머릿속에 자랑스럽게 박혔을 것이고, 지금 열리는 소치 올림픽에 다시 출전하는 김연아의 경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을 것이다.


김연아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의 공백보다, 당장 지금 보고 있는 올림픽 쇼트, 프리 경기에서 김연아는 새벽 늦은 시각에 출전 했기 때문에 그시간을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쇼트 경기의 김연아가 노란색 피겨복을 날리며 빙판으로 미끄러져 나왔을 때, '러시아 홈텃세가 심한데 괜찮을까? 발등 부상때문에 경기도중 아프면 어떡하나?'하는 생각부터 '김연아의 경기를 망치려고 스케이트를 바꿔친건 아닐까?'하고 별별 망상을 다 하였다. 정작 경기가 시작되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여느때처럼 그냥 숨죽이고 화면 속으로 빨려들었다.


가끔 좋은 책이나 영화를 볼 때면, 그 작품에 몰두한 나머지 긴책이 짧게 느껴지고 다른 것에는 신경쓸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이런 느낌을 내가 정확한 룰도 알지 못하는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에서 느끼다니 신기하다. 쇼트는 원래 짧은 경기 시간이지만 김연아의 연기였기에 더 짧게 느껴진 것 같다. 모든 점프와 스텝과 연기가 흔들림도 없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만약 김연아 선수가 한 것만 봤더라면, 다른 선수들도 다 저렇게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경기가 끝난후, 다시금 빙판 위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김연아는 태연하고 담담했지만, 심장이 두쿵두쿵~ 흥분한 것은 나였다.


쇼트 경기에서 김연아 뒷그룹에 나온 경쟁자들, 특히 도발적인 러시아 어린이(어린인줄 알았더니 나랑 동갑이다)는 실망스런 경기를 하였고, 아사다마오는 올림픽 긴장감을 못이기고 무너졌다. 김연아는 다음날 새벽 3시 반쯤 프리 경기에서 마지막 번으로 출전 했다. 가족들은 늦게까지 버텨보려고 하였지만, 하루종일 고단한 아빠와 엄마에게는 좀 무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방학을 맞이해 평소에 늦게 자는 습관을 들여왔고, 마침 북인더갭 출판사에서 새로 출간한 따끈따끈한 르포<18세상>도 있었으니,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방 안에 시계는 없었지만, <18세상>을 몰두해서 읽다가 갑자기 감이 딱 들어 티비 앞으로 움직였다.


티비 앞에서 가족들은 이부자리를 펴놓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영우와 아빠는 옆으로 누운채 입을 벌리고 곯아떨어져 있었고, 엄마만 벽에 기대어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계셨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엄마의 미간은 빈 음료캔을 꽉 쥐어 우그러트린것처럼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눈꼬리는 양 옆으로 쭉 올라갔고, 무엇이 분한건지 씩씩 날숨을 뱉으셨다. 한밤중에 충격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아서 조금 무서웠지만 "엄마, 무슨 일이예요? 너무 피곤하세요?" 라는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에이이~ 러시아 놈들 나쁜 놈들! 어떻게 점수를 저렇게 퍼줄 수가 있어? 이거 완전 짜고치는 거 아니야! 저건 김연아 벤쿠버 점수랑 비슷한 점수인데! 어떻게 저 연기에 저 점수를~!" 하면서 죄 없는 이불을 탁 치셨다.


김연아 이전에 나왔던 러시아 선수가 홈 어드밴티지로 점수를 꽤 많이 받았단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빠도 찌뿌둥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거의 닫혀서 뜬건지 모를 눈으로 주위를 살피시더니 "김연아 나왔어?" 하셨다. 그소란중에 마침 올림픽 피겨의 마지막 순서, 김연아 대망의 마지막 프리 프로그램 순간이 되었다. 나는 "지금 나오네요! 엄마, 점수랑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간에 김연아의 마지막 올림픽, 마지막 경기를 본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봅시다!" 하며 엄마를 달랬다. 낭랑한 피아노 소리가 얼음장을 울리고, 등장할 때 머금었던 웃음기도 삼켜버린 김연아의 몸짓이 시작되었다. 원래 빙상장에 막은 없지만, 방금까지 빙판 위에 드리워져 있던 막이 김연아의 연기 시작과 함께 올라가 버린 것 같았다.


아디오스 노니노!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와 참 맞아 떨어지는구나, 난 그냥 그렇게 느꼈다. 김연아 선수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것들,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이제 안녕을 고하는 것 같았다. 아디오스의 의미 때문에 피겨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억지로 껴 맞춘 상상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순간만큼은 김연아의 피겨 인생이 영화의 엔딩크레딧 올라가듯 계속해서 보여지는 것 같았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졸업까지 이어진 청소년기, 나의 삶이 오버랩되어 가슴이 뭉클했다. 엄마의 뇌경색으로부터, 생활이 어려워 할머니 댁에 얹혀살게 된 수치심, 죄책감, 그리고 고마움... 절대권력의 건물주와 철거계고장 한장에 삶이 종이짝처럼 나부끼는 세입자들, 그리고 중학교 졸업, 새출발...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의 변화를 느꼈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 김연아는 세계 최고의 선수로 활동 하였고, 국민에게 상징적으로 힘이 되주는 존재로 자리매김 했으며 그길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아디오스 노니노는 피겨 불모지, 제 밥그릇만 탐하는 우리나라 정부와 빙상연맹, 아시아 선수의 2연패를 제지하려는 강대국의 발톱과 중상모략 속에서 묵묵히 노력으로 걸어온 길의 결정체같은 무대였다.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내가 무대에 집중해서 들리지 않았나 모르겠지만, 해설위원들도 모두 그녀의 마지막을 조용하게 지켜보는 것 같았다.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그녀의 마지막 무대가 끝나고, 점수가 발표되기 직전 러시아 관중들이 러시아, 러시아를 더럽게 연호할 때에 나는 새벽잠이 다 깨도록 박수를 쳤다.



(위 사진의 출처는 http://photo.kukinews.com/index.asp?number=526 입니다!)